올해 4월은 피 어린 3·1혁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100년이 됐지만, 11월이면 총과 폭탄으로 나라를 되찾으려 한 의열단이 창단된 지 100년이 된다. 행정조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강도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총과 폭탄으로 맞서 싸운 의열단원들의 피눈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독립전쟁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수 있다. 히틀러 같은 제국주의자 1명을 죽여 동포 100만을 살리려 불나방처럼 싸운 의열단원 중 용인 모현읍 출신 남정각(南廷珏, 1897.12.22~1967.1.29)이 있다.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 파담은 숙종대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 선생이 비파와 시를 벗 삼고 말년을 보낸 예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국권이 빼앗길 때 이 마을은 충의와 저항의 고장으로 변모했다. 남구만 선생의 6대손 막내로 태어난 남정각(사진 맨오른쪽)은 아명이 영득(寧得)이다. 맏형인 남정덕은 구한말 별기군 출신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한 무인이었다.

남정각은 일제 치하의 소학교를 다니는 것을 몹시 싫어해 16세인 1913년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그 후 서울 기독교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해 공부했다. 이 무렵 종친인 남태원․규원․도원 종형제가 사립 유신학교를 세웠는데, 그도 지역주민들의 문명퇴치와 인재양성에 힘쓴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 수원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용인·안성 지역에 만세운동이 확산할 수 있도록 선전활동에 나섰다.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1920년 3월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에서 중국청년회 어학과에서 수학했다. 그해 12월 학교를 중퇴한 남정각은 장춘․천진․상해 등지를 순회하다가, 1921년 북경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당시 의열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서장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 중인 김한을 통해 폭탄을 국내로 가져오려 했다. 핵심 참모 류자명이 남긴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에 의하면, 그는 남정각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거사 자금을 김한에게 건네줬다. 이어 남정각이 폭탄 투척 계획에 자원해 서울로 재차 잠입해 거사를 준비했지만 폭탄을 건네받지 못해 실패했다. 1923년 2월 1일 서울을 빠져나와 천진으로 간 남정각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났다. 직접 폭탄을 던지기로 한 그는 투척 연습까지 마치고, 2월 14일 서울에 몰래 들어왔다. 폭파 대상을 조선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인 전기회사 등으로 정한 그는 사전답사로 지형지물을 익히는 등 거사를 철저히 준비했다.

그런데 기다리던 폭탄 운송이 어렵게 되고, 김한이 의열단원 김상옥 사건으로 피체되고 말았다. 남정각은 자금조달을 위해 친일파 집에 잠입하다가 경찰에 피체됐다(<동아일보>1923년 4월 12일자). 이 일로 1923년 8월 7일 의열단원 12명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재판에서 남정각의 법정 최후진술을 보도한 신문은 ‘말끝마다 피가 돋는 남영득의 진술’이란 제목으로 당시 모습을 생생히 전했다.

남정각은 8년 형기를 마치고 1930년 출감했다. 출옥 후 그는 다시 중국 천진으로 망명해 지하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진교민회를 조직했다. 이곳은 의열단의 천진지부로 독립운동자들의 연락 거점지로 활동했다. 그는 단장이라는 책임을 맡아 각종 독립운동 지원사업을 비밀리에 수행하다가 1945년 8월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남정각은 귀국하는 동포들의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힘썼다. 귀국 후에는 고려동지회에 가입해 건국사업에도 참여했다.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67년 1월 병사했다. 현재 무덤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 용인향토사학회와 후손들이 갈담리 파담에 선생의 유허비를 세웠다. 논란과 화제 속에 의열단의 항일활동을 담은 MBC 특집기획 <이몽>이 4일 밤부터 첫 방송된다고 하니 100년 전 젊은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만나봐야겠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