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과 함께 신민부 결성…최고 책임자 중앙집행위원장
8년 옥고 끝에 순국…고향 용인 기흥구에 ‘김혁공원’ 조성

용인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한 명이자 항일무장투쟁 노선을 추구했던 오석 김혁(1875~1939) 장군 순국 80주년 기념 추모식이 국립서울현충원 일원에서 지난 23일 진행됐다. 김혁 장군 유족회가 주최한 이날 행사엔 백군기 용인시장, 표창원 국회의원, 조길생 문화원장, 이용기 서울남부보훈지청장, 박용주 경기동부보훈지청장 외에도 유족과 용인 시민 그리고 경기국학원 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국립 서울현충원 김혁장군 애국자 묘역에서 전통제례로 시작됐다. 박용주 동부지청장, 조길생 용인문화원장, 김영태 증손이 각각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맡았으며 성균관 선비문화학회가 나서 진행을 도왔다.

이어진 추모제는 자리를 옮겨 현충관에서 진행됐다. 동아방송(DBS) 이수현 아나운서의 사회로 △오석 김혁장군 영상 시청(연합 아카이브) △헌무(심규순 명지대 교수) △김혁장군 약사 보고(다산연구소 권행완) △내빈 추모사 (백군기 용인시장, 표창원 국회의원 등) △환영인사(조길생 문화원장) △추모시 낭독(홍일선) △어록낭독(고범석 용인국학원 지부장) △추모서(김성태 김혁장군 증손) △ 단무도(손채명 대한단무도협회) 및 국학기공 공연(경기도국학기공협회) △추모가(벨라보체 중창단) △감사패 수여 △헌화 및 분향 △조총발사(국방부 의장대) △군악대과 함께 독립군가를 합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제례와 추모제까지 자리를 지킨 백군기 시장은 추모사를 통해 “개인적으론 시대는 달랐어도 군인의 길을 간 사관학교 선배이셨다”고 운을 뗀 후 “김혁 장군이 순국하신지 80여년이 흘렀지만 105만 용인시민들은 그 용기와 희생을 늘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혁(본명 김학소) 장군은 1875년 용인 농서리에서 출생해 한평생 구국을 위한 군인과 독립운동의 한 길을 걸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오늘날의 육사) 1기생으로 친위대 정위시절인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항일 투쟁의 길로 나설 것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19년 3월 30일 용인 기흥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같은 해 5월 중국에 망명했다.

흥업단 조직을 시작으로 1925년, 50세의 나이에 북만주 영안현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를 결성하고 최고 책임자인 중앙집행위원장에 추대됐다. 이어 신민부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자 교장에 취임했으며 이때 부교장은 김좌진 장군이다.

1928년(53세) 일제 경찰의 습격으로 체포돼 8년여의 옥고를 치르던 중 위독해 가출옥으로 고향 농서리로 돌아왔으나 1939년 용인 농서리(용수골) 자택에서 순국했다. 1962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국민장)을 추서했으며 1974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했다. 1985년 ‘오석 김혁선생 독립운동기념비’가 건립됐으며 2008년 강남대 부근에 김혁공원이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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