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30일 기흥면사무소 앞에서 3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오전 11시부터 하갈리 냇가를 따라 만세를 시작한 시위에 300여 명이 참여했는데, 마을 유지이며 농사를 짓던 당시 39세의 김구식이 체포돼 징역 1년 6월형을 받았다. 이날 기흥면 만세운동 현장에는 경주김씨 갈천공파 문중으로 막후에서 시위를 지휘한 요시찰 인물이 있었다. 그가 곧 북만주 독립군 부대를 지휘해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신민부의 집행위원장을 지낸 ‘북만주 호랑이’ 김혁(본명 학소, 호는 오석) 장군이다.

 

김혁(1875.10.16.~1939.4.23)은 지금의 기흥면 농서리 254번지에서 법부참서관을 지낸 부친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 6월 구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 김혁은 1년 6개월간의 엄격한 군사교육과 근대식 훈련을 받은 후 광무 4년인 1900년 1월 17일 제1기생으로 졸업하고 19일 육군참위로 임관했다. 동기로는 장차 광복군 총사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된 황학수가 있다(관보/이력서). 그는 친위 제1연대 3대대에 이어 경성시위보병대에 배속돼 정위(正尉)로 근무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 8월 군대마저 해산되자, 곧장 만주로 떠나 독립기지 건설을 모색했다. 귀국 후 그는 황학수 등 동지들에게 만주로 망명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어 35세가 된 1919년 3월 30일 기흥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 조선총독부 행형과에서 작성한 김학소(이명 김혁)에 대한 <가출옥 관계 서류>에 의하면, 그는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의로 그해 5월 단신으로 중국 봉천성 유하현으로 망명했다. 김혁은 백두산 서남쪽 무송현 하북에서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 단체인 흥업단에 가입해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이어 북로군정서에서 독립군 부대 양성에 전념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0년 9월 9일 사관연성소 1회 졸업식에 교장으로 연단에 올라 독립군으로서 자부심과 포부를 가지라고 격려했다.

1920년 10월 21~26일 김혁은 만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는 대첩을 거뒀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과 김혁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연합부대가 일본의 정규군과 10차례 접전을 벌여 괴멸시킨 전투였다. 대첩 이후 일제는 만주의 한인 동포들을 대상으로 보복 학살을 자행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고, 추격을 피해 러시아 자유시로 피신한 김혁과 이청천·오광선 등 독립군 부대는 레닌 정권의 이간질로 인해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참변을 겪으며 1년간 수감돼야 했다.

김혁은 1925년 3월 흑룡강성 영안현에서 대한독립군정서와 김좌진의 대한독립군단 등 21개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군사부 위원장에는 김좌진, 외교부위원장에 조성환이 맡았다. 김혁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아 500여 명의 생도를 배출해 항일전선에 투입했다. 일제는 1928년 1월 25일 신민부 본부가 위치한 석두하자역 고려인촌을 급습해 중앙집행위원장 김혁과 중요 간부 12명을 체포했다.

신의주로 이송된 김혁은 1929년 6월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그는 7년여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1936년 8월 25일 가출옥돼 고향 농서리로 돌아왔다. 이듬해 4월 만주 독립군 동지인 김동삼이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하자, 서울 심우장에서 5일장이 치러질 때 문상을 다녀온 것으로 알려졌다. 김혁은 옥고로 인한 병환을 완치하지 못하고, 1939년 4월 23일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됐고,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올해 서거 80주기를 맞아 유족회가 23일 추모제를 거행한다하니, 만주 호랑이를 다시 뵙고 통일한국의 미래상을 여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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