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24일 김량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용인의 만세운동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3월 28일 아침부터 용인의 북부 모현면 왕산리와 초부리에서는 김명화·김동호 등이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를 부르며 읍내로 향했다. 조선헌병대사령부에서 4월 말 집계한 <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의하면, 이날 용인 모현면 왕산리 시위에 400여 명이 참가했고, 8명이 검거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용인 만세운동 검거자 재판기록을 종합해 보면, 포곡읍 삼계리에서 농사를 짓던 68세 할아버지 김병선은 오전 7시경 태극기를 들고 대열을 이끌었다. 이어 도사마을에서 오래 터를 잡으며 한학을 가르친 유지 권종목이 태극기를 직접 만들어 시위대를 이끌었고, 금어리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신자 홍종욱ㆍ종엽 형제가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태극기를 인계받은 홍종욱·종엽 형제는 주민 2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행진해 10시경 내사면(양지면) 대대리에 도달했다. 홍종업과 박승백 등은 짬을 내 태극기를 더 만들었다고 한다. 포곡면 둔전리에서는 정규복이 권명보 등 수십 명의 동지를 규합해 만세시위에 가담했다.

김구식

이렇게 릴레이 방식으로 모인 각 마을 시위대는 군청소재지로 집결하기 위해 만세를 외치며 유방리에 이르렀다. 이미 읍내인 김량장리에는 임원호·김경운 등이 주민 300명과 함께 용인군청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 무렵 모현면과 포곡면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합세해 1000여 명에 이르러 군청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대가 출동해 유방리에 모인 시위대에 해산을 명했으나, 군중들이 거부하며 투석으로 맞서니 발포로 이어졌다.

3.28 유방리 시위

3월 29일자로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극비)독립운동에 관한 건(제30보)> 문서에 의하면, 이날 발포로 인해 사상 1명이 발생했다. 하지만 아직 사망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김량장공립보통학교 학생인 18세의 이인봉도 이날 체포됐다가 징역 6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아야 했다. 3월 29일 군청소재지와 가까운 내사면 양지리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남곡리에서 농사꾼이며 천주교 신자인 한영규·김운식 등이 마을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주민 100여 명과 함께 양지리까지 만세행진을 벌였다. 남곡리 시위 역시 3월 31일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극비)독립운동에 관한 건(제32보)>에 실렸다.

30일에는 기흥면사무소 앞에서 약 300명의 군중이 집결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지역 유지이며 농사를 짓던 김구식 등이 오전 11시경 하갈리 천변에서 수십 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김구식은 그해 5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에 처해졌다. 그의 재판 판결문(국가기록원 소장)이 그날 상황을 생생히 전해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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