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승태 기자의 시간 창고로 가는길]등기구 전문 민속박물관 ‘한국등잔박물관’

이번 호부터 한 달에 한 번 용인지역 내 박물관 나들이를 하며 듣고 보고 느꼈던 이야기, 박물관과 얽힌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한국등잔박물관입니다. 신세계상업사박물관, 세중옛돌박물관, 만화박물관 등 지역 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박물관이 하나둘 용인을 떠나 아쉽지만, 박물관에 대한 가치를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편집자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2588-9에 있는 한국등잔박물관 모습. 박물관은 오전 10시에 문열어 오후 5시까지 운영된다. 매주 월·화요일은 휴무다. (031-334-0797)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 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을음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나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은 심지만 못쓰게 되고 마는데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도종환의 시 <등잔> 중 일부-

아마도 40년이 족히 된 듯하다. 유년시절 할아버지·할머니는 지금의 처인구 남동 동진마을에 살고 계셨다. 지금이야 역북동에서 명지대학교로 올라가는 큰 도로로 연결돼 있지만, 30~40년 전만 해도 교통이 열악한 마을이었다. 김량장동에서 할머니 댁에 가려면 유일한 길이자 통로는 문예회관 뒤편 아리랑고개(당시에는 동진이고개로 알고 있었다)를 넘어야만 했다. 어렸을 적 어둑어둑해질 무렵 고개를 넘을 때면 짐승들 울음 소리에 머리카락이 곤두서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뛰어서 넘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고개를 넘어서 동네 어귀에 이르러 할머니 댁에 불빛이 보이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싸리로 담을 두른 할머니 댁은 마당과 텃밭, 그리고 툇마루가 있던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집과 가까워 할머니 댁에 자주 놀러 갔는데,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게 호롱불로 불리던 ‘호형등잔’과 ‘남포동’이다. 희미한 불빛이긴 하지만 아마도 고개를 넘을 때 두려움을 잊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시 할머니가 호형등잔 기름으로 무엇을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등잔은 싸리로 담장을 두르고, 너른 마당에 윤기 나는 툇마루가 있는 할머니 댁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아니 할머니·할아버지와 연결해주는 끈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유년시절 등잔 그을음을 추억하며

호형등잔(조선시대) / 사진 한국등잔박물관 제공

용인에는 필자에게 추억과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등잔을 테마로 한 박물관이 있다. 1997년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개관한 한국등잔박물관이다. 이 곳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사용하던 조명기구를 전시하는 등기구 전문 민속박물관이다. 조상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등잔, 제등, 촛대 등 우리나라 전통 조명기구를 한 자리에 모은 전시공간이다.

직업 특성상, 그리고 맡은 분야 때문에 2000년대 중반까지 등잔박물관을 찾곤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박물관을 찾는 발길이 뜸해졌다. 심지어 포은문화제 취재 차 포은 선생 묘역에 갔을 때에도 박물관을 찾아 전시유물을 눈에 담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번이 8~9년 만의 방문이 아닐까 한다.

오랜만의 방문이어서일까? 낯설었다. 그새 잘 정비된 주차장이 생겼다. 주변에는 이런저런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박물관 안에는 그동안 몰랐던 작은 전시공간도 생겼다. 평일이라 그런지 박물관에는 관람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박물관 내부는 냉기마저 감돌았다. 왠지 아쉽기만 했다. 관람객이 없어 아쉬워하다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8~9년 만에 찾는 박물관임에도 예전에 느껴졌던 설렘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등잔임에도 다양한 등기구에 대한 호기심보다 관람객이 없다는 아쉬움이 먼저 들다니. 그리고 조금 들어봤다고, 몇 가지 안다고, 다 아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던 게 설렘을 누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박물관 허수정 교육사로부터 박물관에 대한 역사, 전시공간과 유물에 대한 안내와 설명을 듣고 나니 고 김동휘 관장이 어떤 마음으로 박물관을 건립했을까 짐작이 갔다.

밝고 화려해지는 요즘, 불편함이 그리워

목제제등(조선시대) / 사진 한국등잔박물관 제공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긴 했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등잔으로 불을 밝히곤 했다. 그 때 등심(등잔의 심지)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많은 시인이 ‘등잔’을 주제로 시를 썼다. 30~40년 전 백열전구를 쓰던 시절, 골목이고 방 안이고 그리 밝지 않았다. 어찌 불편함이 없었겠느냐만, 그럼에도 할머니는 등잔으로 방안을 비췄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등잔은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일 게다. 설렘조차 없었던 등잔박물관을 나오는 길, 문득 한겨울 안방 화롯불에 옆에서 희미한 등잔 옆에서 실을 꿰던 할머니, 심지를 돌돌 마는 것을 가르쳐 주시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정수자의 시 <등잔>으로 한국등잔박물관 가는 길을 마무리 한다.

 

 

 

목제등경(조선시대) / 사진 한국등잔박물관 제공

“그리움이 그리워

등잔을 닦습니다.

불을 켜면

고요히 무릅 끊는 시간들

영혼의 하얀 심지를

가만가만 돋웁니다.

(중략)

등잔은

지친 가슴마다

별을 내어 겁니다.”

-정수자의 시 <등잔>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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