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역사인물 발굴 …목사 오건영(吳建泳)

▲ 연도를 알 수 없는 그의 노년시절 사진. 인성을 강조하고 늘 단정하게 비쳐졌던 선생답게 말쑥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것 중 하나는 시대 환경이다. 특히 외세의 간섭과 노골적인 침략기에 태어나 일제 36년 간의 강점기, 그 후 해방 직후의 혼란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았던 세대에겐 역사와 개인이 따로 일 수 없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목사 오건영(1882∼1961). 원삼면 문촌리 문시랭이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가장 역사에 밀착해 살았던 한 인물인 동시에 기독신앙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와 인재양성에 앞장섰던, 용인이 낳은 대표적 실천 지식인이었다.

그의 발자취를 찬찬히 따라가며 만나게 되는 낯익은 이름, 또 그가 활동했던 소속 단체와 기관을 보면 독립 애국운동의 큰 틀 속에서 뚜렷한 한 줄기를 붙잡게 된다. 무대는 해외가 아닌 국내 운동이요, 영역은 기독교를 통한 국민계몽운동이자,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에서 그는 중심을 차지했다.

#오광선 길러낸 삼악학교 훈도로 첫 길 나서

그의 인생에 시작과 끝을 이루는 고향에서의 행적은 역시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삼악학교(三岳學校)’에 그가 훈도(訓導)로 있었던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하다. 삼악학교는 원삼면 능촌(지금의 능말)에다 여준 선생과 오태선, 오용근 등이 협의해 1908년경 세운 비정규 초등교육기관이다. 같은 마을에 사는 전 주사 오항선이 자신의 집을 교사로 기부해 열게 된 이 학교는 바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여준(1862∼1932)과 오광선(1896∼1967)이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은 곳이었다. 삼악학교는 용인을 대표하는 두 해외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오건영을 포함한 세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었던 것이다.

해주오씨 세거지인 고향에서 비교적 넉넉하게 살았던 그가 26세 청년기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정신에 공명하고 대성학교로 떠나 도산의 문하에 수학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교육 및 독립운동 흐름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여준 등과의 연계 및 영향은 짐작해 볼 수 있다.

1908년 평양에 안창호가 설립한 중등교육기관 대성학교는 인재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세워진 만큼 일본국기 불게운동(不揭運動)과 105인 사건 등 반일활동의 본거지였다. 결국 1912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한 뒤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는데, 오건영이 그 19명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충분히 그의 성향을 짐작하게 한다.

#박승봉의 만남과 국내 운동으로 선회

대한제국 전보국 양성 제1기로 수료, 전보 주사로 잠시 근무하던 중 1905년 최대국치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마자 그는 미련없이 직장을 버리고 해외 독립운동을 결심, 국외로 출발한다.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한 한말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동휘와 인천항에서 승선해 부산항을 경유, 해삼위(연해주 블라디보스톡)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내운동으로 선회하게 된 우연한 인연을 맺게 된다. 박승봉(1871∼1933)과의 만남이다. 안동교회 초대 장로였던 박씨는 외교관 생활을 거친 개화파로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남강 이승훈·이상재 등과 친분을 가지고 있던 이였다. 박씨는 구국운동은 해외에서 하기보다는 국내에서 신도를 통한 국민계몽운동이 중요하다는 권유를 오건영에게 한다. 이에 깊이 감명한 그는 박씨 가내에 은신하면서 안동교회 신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서울 한복판 안국동에 있는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 개혁주의 신앙에 바탕을 둔 교회로, 민족교회를 동시에 지향하여 그 맥을 잇고 있다.

오건영은 또다시 남강 이승훈 선생의 초청으로 정주 오산학교의 교직을 역임하기까지 이른다. 당시 평북 정주에 있었던 오산학교는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국내 독립운동의 본거지이자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인재육성의 산실이었다. 여준 역시 그 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으니 한 뜻으로 일생을 보내던 이들의 인연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목사의 길과 옥고

한말 절의의 선비목사 오건영이라는 정체성은 평양신학교를 통해 다져진다. 민족교육과 기독교 탄압을 전제로 우민화정책을 교육정책의 그간으로 삼았던 일제에 맞섰던 평양신학교는 후일 1919년 평양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 곳을 졸업한 후부터 그는 경충노회(京忠老會) 전도목사를 시무하고, 경신학교 교목에 취임해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 나간다. 특히 서울 용산교회, 왕십리 교회, 승동교회(勝洞敎會) 목사로 오랜 세월 시무를 하게 된다.

경신학교와 경신여자학교 이사로서 일제의 한국교육기관 말살의 강제 양교 폐교를 막았으며, 한국 신학교의 본산인 조선신학원을 창설하는 선봉이었던 그에게 가혹한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승동교회 목사로 시무하던 일제 말엽, 몽양 여운형 선생과 모의해 승동교회 청년들에게 구국정신을 고무시키던 중 일본 헌병대에 구속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참혹한 옥고를 겪었던 것이다.

“여운형 선생과 친했던 조부께서는 어느 날 일본을 다녀 와 국제정세를 잘 알고 있었던 몽양선생에게서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라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해요. 당연히 조부께서는 시무를 하는 도중 일본 패망의 필연성을 역설하시는 말씀을 늘 하셨고, 이것이 결국 일경에 꼬리를 잡히고 말았던 거죠.”손자 오준환(58, 원삼면 독성리)씨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다는 얘기다.

감옥에서 풀려나 몸을 고향에서 상한 몸을 추스르던 중 해방을 맞은 오 목사는 기독교 청년회 활동에 적극 뛰어든다. YMCA의 핵심 지도자의 자리인 종교부 간사를 맡아 많은 청소년들을 지도, 오늘날 YMCA가 있게 하는데 주춧돌을 놓았던 것이다.

▲ 만년에 귀향하여 조용히 시서로 소일하질 못했다. 원삼면 민선면장과 교장 등 지역 일을 기꺼이 감당했던 오 목사는 1961년 운명해 문촌리 산 25번지 문수산 자락에 묻혔다. 슬하에는 진근 등 5손을 두었다.
#고향에서의 육영사업

이처럼 일찍이 대한장로교계의 지도자로서 경성, 경기중앙·동·서·남 등 5개 시찰 94개 교회를 조직해 경기노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만년에 조용히 낙향했지만 거인답게 마지막까지 커다란 족적을 고향에 남겼다.
원삼중등교육의 효시이자, 현 원삼중학교의 전신인 ‘원삼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한 것이다. “6.25 전쟁이 나던 해인데, 개교 당시엔 원삼초등학교 터를 빌려 썼어요. 교사 뒤에 천막을 치고 무려 15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눈비를 맞으며 공부를 했지요. 당시 이곳을 수료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진학해, 많은 큰 사람들을 배출했습니다.” 1회 졸업생인 오기환(원삼면 고당리)씨는 어렴풋하게 당시를 또 올리며 “용인의 큰 인물이셨다”고 회고한다.

특히 용인에서도 나라의 인재가 많이 배출된 원삼. 그 곳엔 그가 첫 제자를 길러냈던 삼악학교는 없어졌지만 원삼중학교와 문촌교회에서 아직도 그의 흔적과 애국정신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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