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앵두는 빨간 색이 반짝반짝 빛나며 탱탱하다.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나무노래’를 보면 앵두나무를 이야기할 때 앵돌아진 앵두나무라고 했다. ‘앵돌아지다’라는 말은 ‘못마땅하여 마음이 토라지다’란 뜻이다. 아마 어린 아이들이 앵돌아져 입술을 삐쭉삐쭉 거릴 때의 작고 귀여운 입술이 앵두를 닮아서일까? 그래서 아름다운 여인의 입술도 앵두같은 입술이라 했나보다. 

앵두나무는 앵도나무라고 처음 불렸다. 중국이 고향인 나무다 보니 이름도 한자로 같이 왔다. 중국에서는 꾀꼬리가 먹는다 해서 꾀꼬리 ‘앵(鶯)’자를 쓰고 복숭아를 닮았다 해 복숭아 ‘도(桃)’자를 써서 앵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 땅에선 앵두가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어사전에는 앵두나무라 나오고 식물도감에는 앵도나무로 나온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 걸까?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불러온 앵두나무가 더 입에 맞다. 

앵두나무는 크게 자라지 않는 나무로 많이 크면 3미터에 달하나 밑에서 가지가 많이 나와 관목으로 자란다. 그래서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었다. 예쁜 꽃도 보고 열매도 얻으니 일석삼조다. 
벚꽃, 살구꽃, 복숭아꽃, 앵두꽃은 꽃의 생김새도 비슷하면서 삼사월 봄에 함께 핀다. 그중에 벚나무와 앵두나무는 꽃이 지자마자 잎이 나오기 시작하고, 열매가 모양을 갖춰가다 5월쯤엔 초록색 구슬처럼 달린 것을 볼 수 있다. 6월에 버찌는 까맣게, 앵두는 빨갛게 익는다. 속도전이다. 두 나무 모두 재빨리 열매를 성숙시켜 새들로 하여금 얼른 먹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 씨앗을 퍼트려 주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작은 열매는 당연하다. 이것으로 두 나무의 성격이 좀 급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매실이나 살구는 열매가 조금 더 커서 다 익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열매 크기와 씨앗 크기에 조금 더 공을 들이는 나무들의 성격인 것이다. 이러니 사과, 배, 복숭아는 어떻겠는가? 

이러한 열매들의 공통된 특징을 씨앗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과즙은 단맛과 신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사람들이나 새들이 먹음직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씨앗은 단단한 껍질을 갖고 있어 뱉어내거나 체내에 들어가도 소화되지 않고 배변으로 나오게 된다. 나무가 영리하게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맛있는 과즙을 줄 테니 멀리 퍼트려 달라고. 만약 억지로 먹으려고 하면 탈이 나게끔 씨앗 안에는 독성분을 가지고 있다. 욕심내지 말라는 나무의 신호이다. 앵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집 울타리 안에 앵두나무가 있었다. 꽃이 예뻐서도 심고, 새빨간 열매는 훌륭한 간식으로, 후식으로 사랑받아 왔다. 예전에는 나무 열매 중 가장 먼저 달리는 앵두를 조상들에게 올리는 제사 음식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고려의 정몽주가 지은 ‘포은집’에도 앵두나무에 대해 나와 있다고 한다. 또한 세종대왕이 앵두를 유난히 좋아해 아들 문종이 세자 시절 손수 나무를 심어서 앵두를 따다 바치자 세자의 효심에 무척 흐뭇해했다는 기록이 ‘용재총화’라는 수필집에 남아있다. 6세기 중국의 농업 백과전서인 ‘제민요술’이라는 책에는 앵도나무의 재배법이 나와 있어 사람들이 앵도를 오래전부터 키워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열매는 생으로 먹기도 하고, 화채나 술을 담가 먹기도 한다. 단오 무렵 앵두가 익게 되니 씨를 뺀 앵두를 설탕에 재웠다가 오미자 우린 물에 띄워 화채를 해 먹는 것이 단오의 풍습이다. 

이정록이라는 시인은 앵두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앵두를 오래 먹는 법은 따 먹지 않는 거다/ 한 주먹 우물거려도 앵두씨나 가득할 것을/ 싸돌아다니는 닭들 목구멍이나 막히게 할 것을/ 툇마루에 그림자 하나 앉혀놓고 눈으로 먹는 거다…’
먹어 없어지는 것보다 나무에 초롱초롱 달려있는 앵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더 좋다는 것에 동감을 표한다. 오래도록 그 모습을 보고 싶다. 그토록 앵두나무에 빼곡히 달린 빨간 구슬들은 매혹적이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