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반 미국 뉴욕 브룩쿨린 남쪽 끝 코니 아일랜드에서 놀이공원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테마파크와 야생동물 쇼, 전기 조명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가족들이 아이들과 주말마다 놀러가는 코니 아일랜드 한쪽에 작은 공연장이 있었다. 이 공연장에는 다른 놀이공원과 다른 것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바로 인큐베이터에서 생활하는 미숙아들이었다.

‘놀라운 기계 엄마’라는 이름의 인큐베이터 쇼는 코니라는 사업가에 의해 운영됐다. 사람들은 25센트, 현재가치로 약 7000원 정도의 입장료를 내고 미숙아들을 관람했다. 작은 미숙아들이 인큐베이터에서 어려운 삶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구경거리로 만든 것은 현재뿐 아니라 당시에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어린 아기를 구하기 위한 부모들의 마지막 탈출구였고, 생존이 불가능한 1kg 미만 미숙아도 기적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인큐베이터 쇼는 계속되고 있었다.

코니의 인큐베이터 쇼는 프랑스 의사 리온의 아이디어였다. 리온은 타르니에가 개발한 인큐베이터를 멋지게 개선했는데 튼튼한 철제 구조물에 유리창을 설치하고 자동온도조절장치, 신선한 공기를 환기시켜주는 장비를 갖춘 혁신적인 신제품이었으나 가격이 너무 비쌌다. 시대를 앞서 나간 값비싼 인큐베이터를 찾는 병원은 없었고 정부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리온은 이런 어려운 난관을 정말 기이한 방법으로 해결했다. 인큐베이터 운영비를 관람료로 해결한 것이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생활하는 미숙아들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자그마한 아기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찾는 사람들은 많았다. 사람들은 수 천원의 관람료를 내고 인큐베이터의 미숙아들을 구경했다. 리온은 더 나아가 자선단체를 만들고 마침내 1896년 베를린에서 열린 박람회에 인큐베이터 쇼를 개최했다. 리온의 인큐베이터 쇼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의료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윤리적이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대중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인큐베이터 쇼는 관심이 높아졌고 관람객은 더 늘어갔다. 리온과 함께 인큐베이터를 홍보하던 코니는 최신 장비를 들고 미국으로 이주해 인큐베이터 쇼를 벌였다. 코니의 인큐베이터 쇼 중 유명한 것은 뉴욕 남쪽 코니 아일랜드의 인큐베이터 쇼였다. 놀이공원 한쪽에 설치된 인큐베이터 쇼장에는 의료기관이 포기한 절망적인 미숙아들이 엄마 손에 안겨 들어갔다. 쇼를 하는 공간 뒤편에는 코니와 의료진들이 아기들을 세심하게 보살폈고, 관람수입은 매일 40만원이 넘는 인큐베이터 운영비를 감당할 수 있게 했다. 코니의 인큐베이터 쇼는 의료계에도 당연히 영향을 줬다.

미국의 의사 드리는 의료기관에 인큐베이터를 도입하고 전문적인 신생아 치료를 시도했다. 집에서 태어나는 미숙아들을 위해 이동형 인큐베이터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의료기관의 봉사나 희생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여러 곳에 도움으로 간신히 인큐베이터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드리가 은퇴한 뒤에는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반면 코니가 운영하는 인큐베이터 쇼는 인기가 점점 더 많아졌다. 물론 코니의 인큐베이터 쇼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1904년 루이지애나 엑스포에서는 유행성 장염으로 인큐베이터 미숙아 절반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있었고, 1911년에는 뉴욕 엑스포에서 발생한 큰 불은 미숙아들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

코니의 인큐베이터 쇼는 지속적으로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1914년 시카고에서 인큐베이터 쇼를 기획하던 코니는 지역 의사회 추천 의사의 감독이 없을 경우 허가할 수 없다는 경고를 받고 있었다. 결국 코니는 지역 의사회가 추천한 의사를 감독으로 받아들였는데 소아과 의사 헤스였다. 헤스는 코니의 쇼를 보면서 미숙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인큐베이터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고, 병원에 인큐베이터를 갖춘 신생아실을 설치했다. 헤스는 드리와 달리 많은 재정 후원을 받는데 성공했다. 특히 신생아실을 담당하는 간호사 런딘을 만났다. 런딘은 신생아실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의사들이 놓치기 쉬운 세밀한 것들을 찾아냈는데 신생아실에서는 가운,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우유도 스포이드를 사용해 감염을 예방했다. 신생아실 간호사들이 엄마의 손길을 대신했던 것이다. 헤스는 인큐베이터를 이용한 신생아 치료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발표했고, 이후 많은 병원에서 인큐베이터를 활용한 신생아 치료에 나섰다.
1940년대 많은 병원이 인큐베이터를 확보했고 코니는 인큐베이터 쇼를 끝냈다. 40년 동안 8000명의 미숙아를 치료한 코니는 6500명의 귀중한 생명을 구했다.

인큐베이터는 전 세계로 확산됐고, 우리나라도 1960년 신생아실이 개설되면서 인큐베이터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30%에 불과하던 저체중아 생존률이 2010년경에는 85%로 높아졌다. 최근 신생아실 사망사건은 의료계뿐 아니라 우리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한국의 인큐베이터 1일 운영비는 불과 2만원 선으로 신생아실을 운영할수록 적자를 본다고 한다. 백 년 전 관람료 수준의 인큐베이터 비용은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안전하고 좋은 진료를 위해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 선진국들도 많은 시행 착오 끝에 과감한 투자를 통해 안전한 의료환경을 만들어가고 있고, 중앙정부 뿐 아니라 지방정부도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지방정부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역 의료기관에 아낌없는 지원으로 주민들이 안전하고 좋은 환경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본지 915호 13면 ‘신생아를 위해 내민 손길 인큐베이터’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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