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업무 폭주로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지친 어느 날, 한 아이가 유난히 교실에서 예민하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있다. 나도 다른 날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저 아이가 마음이 아파서 그렇구나’라고 보기보다 ‘저 아이가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라고 느껴진다. 그 순간 그 아이에 대한 내 느낌이 확 달라진다. 화가 욱 하고 올라온다. 내 몸, 마음, 영혼이 지치고 힘든 날이 문제다.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한 반응에 ‘또 힘들게 하네’ 라고 ‘ 피해자’ 모드로 해석하기 쉽다. 그런 날은 화, 짜증, 원망 등 부정적 감정이 자동적으로 개입된다. 자동적, 무의식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문제아도 미덕천사도 다 내 마음, 에너지에서 온다. 

또 내 열등감을 건드리는 일이거나, 내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건드리는 행동을 했을 경우도 비슷하다. 그럴 때 나는 내 문제로 인해 한 아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없다. 결국 내 자신이 ‘피해자’ 모드를 벗어나야 그 아이가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보인다. 찬찬히 멈춰야 이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미워질 때, 아이가 답답한 느낌으로 보일 때 나를 먼저 들여다본다. 그게 그 아이에게 죄를 짓지 않는 일임을 안다. 어린 시절 1200시간을 부정적인 한 사람과 보낸다는 것은 참 가혹한 일이다. 아니 어쩜 그 아이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인 것이다. 나는 죄를 짓고 싶지 않다. 하루하루 좋은 선생님이 되는 길, 그냥 멈춰 서서 내 맘을 들여다보는 게 답이다. 

어떤 순간에도 만약에 한 아이가 미덕의 원석을 이미 가지고 있는 아이이고, 나는 그것을 깨울 수 있는 교사라고 믿는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 아이의 부정적 행동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그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깨우도록 도우면 그만이다. 그 때 교사는 ‘피해자’ 모드가 아닌 ‘선택자’ 모드다. 피해자 모드는 방어를 하고 두려움으로 반응해 그 아이에게 비난, 수치심으로 대하기 쉽다. 하지만 어떤 부정적 행동에도 ‘미덕’이라는 선택지가 있다고 믿는 교사는 달리 해석한다. 

교사는 아이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 문제아가 교실에 왔을 때 문제아로 보는 게 정답일까? 문제는 문제를 보게 하고, 부정적 에너지를 불러올 뿐이다. 더 민감하게 문제를 보고, 반응할 수 있다. 결국 그 아이의 문제를 더 강화시킬 뿐이다. 교사가 아이의 문제에 집중하면, 아이는 다 안다. 교사의 마음에서 나오는 부정적 에너지, 두려움 에너지에 아이가 더 아프고, 힘들다. 희망을 잃은 아이는 더 큰 두려움 에너지로 답한다. 아이는 이제 편하게 문제 행동을 한다. 분노한 교사가 더 소리를 지르고 아이에게 수치심을 준다면 이건 학기 마칠 때까지 악순환의 고리다. 

그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아이에게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 아이는 이미 미덕의 보석이 내면에 있다. 문제 행동을 했다고 이미 영혼에 주어진 미덕 보석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아이 스스로가 자기 미덕 보석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런 아이일수록, 문제아일수록 답은 하나다. 문제아일수록 미덕 보석을 알려주고, 봐 주는 단 한사람이 필요하다. 

“영훈아, 네 보석이 아직 자고 있어서 그래. 우리 영훈이가 곧 깨울 거 알아. 선생님은 네 보석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 “넌 보석을 깨울 수 있는 사람이야!”
무의식에 저장돼 평생 아이가 쓰러질 때마다 일으켜 세울 것이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