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의 연원

광주시 오포읍 광주 정씨 모역에 있는 신도비 모습

정씨의 본관은 고문헌에 250여 본이라 전하나 오늘날 현존하는 본관은 광주, 동래, 하동, 연일, 초계, 청주, 온양 등 30여 본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정씨의 원조는 신라6촌 중 진지촌 촌장 대인 지백호로부터 출발해 여러 본관으로 나뉘게 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또한 정씨의 가장 큰집은 경주 정씨라 전하며 대부분의 정씨들은 경주로부터 분적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각 본관들은 지백호 이후 언제 어떻게 분관됐는지는 상고할 수 없는 형편이나 우리나라의 모든 정씨들은 지백호로부터 시작됐다하며 득성조를 지백호로 삼고 있다. 다만 서산 정씨, 낭야 정씨는 중국으로부터 귀화한 성씨로 동성이족에 속한다.
 
광주 정문의 시작
광주 정씨의 시조는 현 광주광역시에 세거하던 정씨의 후예인 정신호를 시조로 하고 있다. 정신호는 고려 충숙 우왕조대에 판도사 상호군 대사헌 삼중대광문하찬성사를 지낸 인물이다. 본향은 광주 양림. 단소는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무량동)에 삼부자를 모셨다. 단제는 1월 3일이다.

이로부터 후손들은 정신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본거지인 광주광역시를 본관으로 해서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로부터 6세에 들어와 가문이 번성하자 완백공, 동백공. 응교공 수사공  등 10여개 파로 분파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주 정문들이 남긴 문화재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국보로 지정돼있고 경기도 동두천시 광주 정씨 고장 고문서 중 교령류, 소차계정류, 첨관 통보류 명문 무기류 4종 61점이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 고문서는 조선시대 경제상황을 알려주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

본관지인 광주는 후백제 시기에 무진주라 했다가 광주로 이름이 변화되다가 조선시대 성종 20년에 광산현으로 명칭이 바뀌어 본관지 광주가 변화됨에 따라 광산 정씨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명칭은 광주 정씨로 통용되고 있다.

광주 정씨 문중을 빛낸 인물

경기 동두천 광주 정씨 소장 고문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7호

고려조에서 봉익대부로 한성부윤을 역임한 정귀진은 우왕 2년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해 조선조에서 강원 감사 성균관 대사성(정 3품 관직)을 역임했다. 또 정세운(?~1363)은 공민왕이 세자 때 고려에 인질로 갈 때 함께 원에 가 세자를 보필하고 귀국해 세자가 왕에 오르자 그를 보필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됐다. 이후 원나라 앞잡이며 친원파인 기철을 살해하고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공헌했다.

고려조에서 발판을 구축한 광주 정문은 조선조에 들어와 과거급제자 33인을 배출해 명문 거족으로 발돋음했다.

조선조에 인물을 보면 정인인(?~1504)이 있다. 그는 1498년(연산군 4년) 식년문과에 장원해 관식에 진출했는데, 제주목사 재임 때에 연산군이 이마의 흰털이 별처럼 박힌 말을 보내라하자 이를 수행하지 않아 파직되고 갑자사화 때 홍문관 재직시 연산군을 비방하는 시를 지었다 해서 죽임을 당했다.

중종 연간에 정만종은 함경도,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특히 당대의 최고 권신이며 간신으로 알려진 김안로가 못된 짓을 하자 아를 비방하는 글을 임금에게 올렸다. 정이주는 사헌부 장령(정 4품 관직)으로서 강직해 여러 권신들에게 비판을 받자 사임하고 향리인 춘천으로 내려가 학문을 닦으며 후진양성에 노력했다. 그의 아들 정사호는 글씨를 잘 쓰기로 정평이 있었으며 별시문과에 합격해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정두원은 1630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중국식 대포인 홍이포 자명종 망원경, 서적으로 서양국 풍속기 홍이포제본, 천문도 등을 들여와 서양 문물을 소개했다. 이는 서양 문물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이들 가운데 이름이 최초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정춘수가 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규합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정용대가 있다.

겸재 정선, 용인 입향조의 대종손

호암미술관 소장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국보 제217호

진경시대란 중국의 문화를 모방하던 시대에서 우리고유의 문화가 꽃핀 시기를 일컫는다. 진경시대는 임진·병자 양란 이후 숙종 년간으로부터 정조 년간에 우리 고유의 문화를 꽃피우던 시대를 문화사적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한 것이다.

이 시기에 우리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킨 내용을 보면 글씨로 고유의 서체인 한석봉의 서체를 발전시킨 송시열 서체와 송준길의 서체를 합친 양송체가 서인의 글씨체로 남게 된다. 남인에서는 이서가 동국진체라는 독득한 서체를 개발했다. 도자기로는 조선 특유의 그릇 형태인 순백색의 그릇이 제작됐다.

문학에서 김만중의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의 순 한글소설이 나타나기 시작해 우리 고유의 문학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림으로는 중국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산천을 그린 겸재 정선, 서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화폭에 담은 조영석이 있다.

진경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겸재 정선을 들 수 있다. 정선(鄭敾 1676~1759, 호 겸재)은 용인 입향조 창문의 대종손으로 진경시대 대표적 화가로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과 함께 조선시대 화가 삼재라 불린 인물이다. 그는 우리 강토와 산수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작품이 100여점 전해지고 있어 어느 화가 보다 많은 작품이 남아있지만 아쉽게도 그의 유고집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용인의 광주 정씨
용인의 광주 정씨들은 광주시 오포면 추자리 집성촌으로부터 연유한다. 추자리에 시조로부터 9세손인 정응규는 조선 중종 년간에 낙안 군수를 역임하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건라좌도 수군절도사(수군절도사 : 각도의 수군 총책임자로 정3품 벼슬)를 역임했다. 공이 돌아가심에 조정에서 예장하고 인근 지역을 사패지로 하사했다. 이후 추자리에 정씨들이 스스로 새로 마을을 이뤄 마을 이름을 자작촌이라 했다.

광주 정씨는 500여년 전부터 씨족 마을을 형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까지도 70여 호가 거주하는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30여 호 만이 선산을 지키고 있다.

입향조는 아들 한 사람만 두었으나 손자가 6형제라 가문이 크게 번성해 많은 인물을 배출해 사회 발전에 기여해 왔다. 용인 모현의 광주 정문은 추자리 입향조의 여섯 손자 중 맏이며 안악 군수를 역임한 정흥문이 입향조가 된다.

50여년 전만해도 처인구 모현면에 일산리를 중심으로 50여 가구가 거주했으나 현재는 30여가구가 선영을 지키고 있다. 모현의 광주 정씨 문중에서 배출한 인물로 기업인 정형기를 들 수 있다. 정형기는 모현초교를 졸업하고 서울 양정고등학교, 건국대를 거처 기업에 투신해 (주)라성, 라설유통주식회사, 호텔, 라성 자동차 매매단지를 일궈 라성그룹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남의 돈을 쓰지 않는 알짜기업인으로도 유명하며 특히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공헌하는데 노력해 라성 정형기재단을 설립, 각 대학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고향 사랑이 깊어 40여년 전 모현중학교 설립 시에 부지를 매입, 희사하고 용인시민장학회에 거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또 모현면 각종 행사 시에는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줘 행사가 원만히 이뤄지도록 도움을 줬다. 정형기는 광주 정씨 문중이 배출한 모범적 기업인이기도 하지만 용인이 낳은 기업인이기도 하다.

그 외 전 경기도농업협동조합 경기도지부장을 역임한 정호성, 충렬서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용인시 한시회를 이끌었던 정영재, 전 수지구청장을 역임한 정윤호가 있다. 또 정정부와 정윤준은 문중에 대소사 일을 보면서 씨족상호 간에 우의를 돈독히 하는데 힘쓰고 조상의 유훈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포곡에 광주 정문이 전대리를 중심으로 50여 가구가 세거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현에서 이주했다. 포곡의 인물로 21대 면장을 역임한 정인재, 26대 면장을 역임한 정완재, 건국대 교수를 역임한 정인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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