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촌시대에서 편의점보다 많아진 의료기관

사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국회는 법을 만든다. 그러나 과도한 법적 구속은 자유로운 경쟁을 방해하고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불필요한 규제를 폐지할 필요도 있다.  정부도 과거 여러 차례 불필요한 제도 폐지, 보완 작업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행해 왔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규제개혁위원회를 신설해 1만여 개의 법규를 검토해 수정했는데 1998년 8월 14일 진료권역 의료전달체계를 없앤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진료권제도는 대형병원 선호 현상을 막기 위해 거주지역 근처 의료기관을 먼저 방문해 진료를 받게 하는 제도였다. 경증 환자들이 큰 병원에 집중될 경우 중증환자 진료 차질과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 보험체계를 도입하는 여러 나라에서는 개인 의원에서 일차 진료 후 의료진이 상급 병원 진료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있을 경우에만 환자가 전원되는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도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과 함께 진료전달체계가 실시됐는데 대형병원을 선호하는 한국민의 정서와 맞지 않아 각종 민원이 발생했다. 결국 1998년 진료권제도는 ‘규제’라는 명목으로 사라진 것이다.

진료권제도가 없어진 후 전국 어디서나 진료 받을 수 있는 편리함이 생겼다. 하지만 반대로 전국 어디서나 서울 대형병원을 갈 수 있는 권리가 생기면서 전국의 환자들이 서울로 집중되는 부작용이 발생했고 2015년 메르스 유행시 한국에 큰 피해가 발생한 원인이 됐다.

과거 우리나라는 의료전달체계보다 의료기관이 없는 지역, 즉 무의촌 지역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조선시대 지방에는 전문적인 의료시설이 부족했으나 구한말 이후 각 지역마다 선교사와 민간기관들이 의료기관을 설립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3천 곳의 전국 의료기관 중 절반 이상이 파괴됐다. 한국전쟁 이후 경제 회복과 더불어 대도시는 의료기관이 빠르게 증가했지만 지방 일부지역은 의료기관이 하나도 없는 소위 무의촌으로 불리는 곳이 많았다.

정부는 무의촌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촉탁의, 공중보건장학생 등 각종 제도를 시도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0년 군복무 대신 3년간 농어촌지역에 근무하는 공중보건의사제도가 도입되면서 5백여 곳이 넘던 무의촌은 사라지게 됐다. 1980년대 후반 의과대학 신설이 급증하면서 의사 수도 늘어나기 시작해서 1980년 1만5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2017년 10만 명을 넘었다. 많아진 의사들은 대도시뿐 아니라 전국 각 지역에 의료기관을 개설해 2017년 전국 의료기관 수는 편의점보다 많은 3만여 곳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무의촌이 사라지고 언제 어디서나 쉽게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양적 의료정책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높아진 욕구와 더 좋고 큰 의료기관을 선호하는 현상으로 종합병원에 환자가 집중되는 반면 작은 의료기관들은 빈 병실이 남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의료전달체계는 의료기관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국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제도였으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동네 의료기관 이용을 유도하기 위해 주치의제, 만성질환관리제 등을 시도하면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의료전달체계가 유명무실화된 지 20년 가까이 된 지금 다시 강제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구속과 불편 등의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 국민 스스로 증상이 경미할 경우 지역 의료기관을 방문해 의료진의 진료를 받는 지혜가 필요하다. 용인시민도 타 지역 대형병원을 찾는 것보다 용인시 의료기관을 이용하면 우리 동네 병원들이 좋은 의료기관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시민 건강을 지키는 것은 물론 지역사회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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