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가을이 왔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고 비도 오지 않았다. 사람들도 더위에 지쳐 전기세 폭탄을 맞을까 걱정하면서도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었다. 올 여름 비가 내리지 않아 농작물도 숲에 사는 식물들도 힘든 날을 보냈을 것이다.

숲 가장자리에서 잎이 도로록 말리고 꽃이 핀둥 만둥한 싸리를 보았다. 물 한바가지 퍼주고 싶었다. 싸리는 여러 개의 꽃이 번갈아 피고 지는 식물이라 오랫동안 꽃을 볼 수 있다. 진한 분홍색 꽃이 무리지어 피면 참 볼 만하다. 하지만 크기가 작아서인가, 화려하지 못해서인가, 영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싸리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싸리는 콩과의 키가 작은 나무로 콩꼬투리 모양의 열매가 달린다. 콩과 식물은 대부분 작은 잎들이 모여 하나의 잎을 만든다. 싸리는 세장의 작은 잎이 모여 한 장의 잎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아까시나무도 15개 가량의 작은 잎들이 모여 하나의 큰 잎을 만든다. 작은 잎들이 어떤 식물은 홀수로, 어떤 식물은 짝수로 난다. 그래서 아이들이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된다, 안 된다’하며 잎을 하나씩 떼어내는 놀이를 할 때, 식물 잎의 특징을 알고 있다면 결과도 미리 알 수 있다.

싸리를 비롯한 콩과 식물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그것은 콩과 식물의 뿌리에 공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 때문인데 그것이 질소 영양분을 고정하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길을 내느라 산 중간을 잘라 양옆으로 흙이 드러난 곳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경사면이 흘러내리지 않게 식물을 심는데, 싸리도 그런 식물중 하나이다. 버려진 땅이나 자투리땅에도 싸리는 금방 자리를 잡고 무성하게 자란다. 이렇게 싸리처럼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식물들이 있어야 그곳에 땅이 기름지고 축축해져서 더 많은 식물들이 자랄 수 있다. 후엔 무성한 숲이 되니 참 고마운 식물이다.

그런데 매년 추석 전에 벌초를 하러 묘소에 가보면 꼭 싸리가 들어와 있다. 뿌리째 없애지 않으면 나중엔 더 힘든 작업을 해야 하니, 이럴 땐 참 성가신 존재이다. 사람도 식물도 어디에 뿌리박고 사는지가 참 중요하다. 가끔 조팝나무를 싸리나무라고 하는 어른들을 만난다. 하얗고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나는 그 모습을 보고 쌀나무, 싸리나무라고 부른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싸리나무를 싸리나무라 부르게 된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싸리는 어디서나 잘 자라기 때문에 옛날부터 실생활과 아주 밀접했다. 잔가지가 무성하기 때문에 울타리를 치고 문을 만들기에 좋았다. 줄기는 단단하지만 잘 휘어져 빗자루, 소쿠리, 삼태기, 키 등을 만들었고, 깨끗하게 쪼개어져서 윷짝을 만들기도 했다. 불이 잘 붙어 불쏘시개, 횃불을 만들었다. 어렸을 적 내 키만한 큰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었던 기억이 있다. 가벼워 어린아이도 들 수 있지만 딱딱하고 성글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잔가지를 주로 썼는데 아마도 싸리였나 보다.

요즘 주변엔 싸리빗자루로 쓸 수 있는 마당도 없고, 솥을 걸어 불을 피우는 아궁이도 없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잠금장치가 기본인 세상에서 싸리울타리, 싸리문은 옛날이야기에서나 들을 수 있게 됐다. 삶이 참 많이 변했다. 생활에 흔히 쓰이던 식물이 점점 생활과 멀어지고 있다.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물건들이 많아져 좋기도 하지만 자연과 멀어지는 느낌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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