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 후 기념사진을 찍는 문중들.

 

봉화 금씨 연원
봉화 금씨는 먼 조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들어올 때 금응이라는 분이 함께 들어와 금씨 가문을 열었다는 설과 공자의 제자 금노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모화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이다.

봉화 금씨의 시조로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태사인 동원군 용식이나 세수가 불분명해 용식의 후손인 영열공 의(儀)를 1세조로 하여 세를 이어오고 있는 가문이다. 영열공 의는 고려 명종(1170-1197) 때 대과에 급제해 벼슬을 두루 역임했으며 특히, 이규보, 이인노, 조충을 길러낸 인물이다.

봉화 금씨의 봉화는 경상북도 봉화군을 의미하며 과거 지명은 봉성(鳳城)이었으므로 봉성 금씨라고도 했다. 금씨들이 세거하는 곳에 따라 계양, 안동, 강화, 평해, 금산 등을 본관으로 삼고 있으나 이들 모두 봉화 금씨의 후예들이므로 1983년 족보 편찬 때 봉화로 통일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5년 정부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2만355명이고, 2000년도 통계에 의하면 7144가구에 인구 2만3489명에 이르고 있어 희성에 속한다.

봉화 금씨는 먼 조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들어올 때 금응이라는 분이 함께 들어와 금씨 가문을 열었다는 설과 공자의 제자 금노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모화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이다.봉화 금씨의 시조로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태사인 동원군 용식이나 세수가 불분명해 용식의 후손인 영열공 의(儀)를 1세조로 하여 세를 이어오고 있는 가문이다. 영열공 의는 고려 명종(1170-1197) 때 대과에 급제해 벼슬을 두루 역임했으며 특히, 이규보, 이인노, 조충을 길러낸 인물이다.봉화 금씨의 봉화는 경상북도 봉화군을 의미하며 과거 지명은 봉성(鳳城)이었으므로 봉성 금씨라고도 했다. 금씨들이 세거하는 곳에 따라 계양, 안동, 강화, 평해, 금산 등을 본관으로 삼고 있으나 이들 모두 봉화 금씨의 후예들이므로 1983년 족보 편찬 때 봉화로 통일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1985년 정부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2만355명이고, 2000년도 통계에 의하면 7144가구에 인구 2만3489명에 이르고 있어 희성에 속한다.

고려조에 활동하다

시조 금용식 이후 뚜렷한 행적을 남긴 이는 전하지 않고 중시조 의(1153-1230)가 1184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220년 벽상공신이 됐으며 수태보문하시랑중서문하평장사팡이부사에 치사된 인물이고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영렬공이 청도의 감무로 나가 있을 때 일 처리에 있어서 굽히지 않는 강직함을 보여 백성들이 철태수(鐵太守)라 했다고 한다. 여러 차례 과거시험 총 감독관인 지공거를 역임하면서 고려조 유명인물인 이인로, 이규보, 임영령 등을 문하에 뒀다.

봉화 금씨는 영렬공부터 고려정계에 진출하면서 명문으로 등장해 맏아들 기는 호부원외랑, 둘째 규는 공부원외랑, 넷째 휘는 좌우위대장군, 다섯째 희는 합문부사를 지냈다. 가까운 집안의 공부시랑, 경상도 안찰사를 역임한 8세 금훈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왕명으로 원에 가서 원병을 청하는 역할을 했다. 12세 숙이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낙향해 안동, 예안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특히 다섯 자제가 문과, 무과에 합격해 그가 살던 집을 지금도 오자등과터(五子登科基)라 부르고 있다. 또 12세 극해는 포은의 문인으로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해 담양군사을 지냈으며 이후 4세가 내리 문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리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금인배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 방간을 사위로 삼으면서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으나, 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원에 패하고 귀양 가게 되자 처족인 금씨도 영향을 받아 조선조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러한 연유로 금문들은 벼슬에 뜻을 두기보다는 유학정신에 입각해 향리에서 충효를 실천하는데 노력해 조선조 문과급제자는 14명에 불과하다.

금문의 세거지와 이황
 

묘역전경


봉화 금씨들은 경북 일대, 충북 옥천영암, 경기도 용인, 강화에서 세거해오고 있다. 상계는 추적할 수 없고 10세 금우공대를 전후해 봉화군 상운면 일원에 터를 잡고 세거하기 시작했고 13세 금미의 후손은 충북 옥천군에 옮겨가 세거했다. 14세 금원팽 이후로 안동군 풍산읍에 터를 잡고 17세 금사룡이 경기도 화성에 세거하기 시작했다.

1983년 통계에 의하면 경북 봉화군, 영양군, 안동군, 영주군, 문경군, 대구시, 충북 옥천군, 경기도 용인, 인천시 강화군 등지에 세거해 있다. 특히 봉화군 세거촌은 마을 터가 비봉포란(飛鳳抱卵)형으로 거문고 금(琴)과 조화를 이뤄 가문의 번성을 이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 중기에 봉화 인근은 금씨 가문이 매우 명망 있는 가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비석의 퇴계소전(退溪小傳)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의 최고 명유이며 학자인 퇴계 이황 맏며느리가 금씨이다. 퇴계의 아들이 처가에서 혼인식을 하고 집에 돌아올 때 금씨 문중 사람들이 “우리 문중 규수를 어느 명문가엔들 시집 못 보내겠기에 하필이면 이황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며느리로 준단 말이요, 그런 사람이 우리 집안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었던 것만도, 우리로서는 가문을 더럽힌 것이요, 그가 앉아 있었던 마루를 깨끗이 씻은 후 대패로 깎아 내시요”하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 후 퇴계 집안에서 들고 일어나자 퇴계가 집안 사람들을 만류해 양 가문의 불상사는 없었다. 퇴계는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했다. 시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은 며느리 금씨 부인은 유언하기를 “내 생전 시아버님을 모시는데 부족함이 많았으니 죽어서라도 정성껏 모실 수 있게 시아버님 묘소 인근에 묻어 달라”했다 한다.
한때 퇴계를 푸대접했던 금문이지만 이를 인연으로 많은 금씨네 젊은이들이 퇴계 문하에서 수학해 성리학과 문장으로 저마다 이름을 남겼다. 그중에서 금보는 명필로 퇴계의 비문을 쓰고, 금응석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만석꾼으로 재산을 아끼지 않고 이웃을 구휼했다.

 

충과 효를 실천
 

세장비

조선조에 들어와 봉화 금씨는 특출하게 높은 관직이나 명예로운 관직에 오른 이는 드물고 다만 조선 초기에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간을 거처 이조판서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된 금유, 대사간을 역임한 금고, 세조 때 문무 양과에 급제해 문명을 떨친 금휘 등이 관직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금문의 가훈인 효제신양(孝悌信讓)에 따라 충신과 효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조 때 금홍달은 어머니의 좋은 약재를 백방으로 구하려 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애를 태울 때 효성에 감복했는지 까마귀가 그 약초를 마당에 떨어뜨리자 그 약초를 다려 드리니 병환이 나았다 하며 겨울에 은어를 먹고 싶다함에 제철 아닌 은어를 구할 수 없어 호숫가에서 근심하고 있는데 은어가 얼음 위로 튀어나와 이를 드렸다고 한다.

또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해 여러 형제가 분가하지 아니하고 함께 기거하며 조석으로 담소하며 정을 나누니 순조 12년에 효자정문이 내려졌다.

숙종 때 금사하는 어머니가 급환이 일어나자 강 건너 약방으로 약을 구하러 가는데 갑자기 홍수가 나 건널 수 없게 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호랑이가 와서 타라는 시늉을 해 이를 타고 약을 구해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함께 곡하며 절을 했다고 해 세인들은 금사하를 금효자, 호랑이를 의호라 했다. 사림이 국가에 주청해 국가로부터 상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영월 주촌에 의호총(義虎塚)이란 표석과 함께 남아 있다.

그밖에 금종구, 금오, 금기일 등의 효에 대한 일화가 전해와 효자가문으로 자긍심을 같게 하고 있다. 충신에 관해서는 국가에 큰 벼슬을 하며 국가에 공을 세운 출중한 인물은 없으나 초야에 묻혀 후학을 기르다 국난을 당하면 의병을 모집해 국난 극복에 기여한 인물이 많다.

금난수는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 왜병 격퇴에 많은 공을 세워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의 동계정사에 제향됐다. 1593년 권율 수하에서 권응수, 김응서 등과 협력해 적막사 40여동을 불사른 금윤선, 조중봉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금산대회전에서 순절한 금응신 등이 있다. 그 외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금경,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난적평정에 기여한 금옥,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하다 붙잡혀 옥사한 금달연, 향중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돼 활동한 금용하 등이 있다.
 
용인의 봉화 금씨들

경북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에 살던 금문 중 17세 금사룡이 400여년 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현재 동탄신도시)로 이거하면서 화성, 용인에 세거하기 시작했다.

증공조참판인 20세 금흡(1714-1767)이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에서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구매마을로 이거해 용인에 봉화 금씨 씨족촌을 이루게 됐다. 용인에 금씨들은 기흥구 고매동 구매마을에 뿌리를 두고 분산돼 고매동 원고매, 처인구 고림동에 분포돼 있다.

처음 씨족촌을 이룬 구매마을은 1970년대 만해도 마을 전체 34가구 중 2호만 타성이고 모두 금씨들이었다. 두 집 역시 사돈 관계의 인척간이었다. 현재 구매마을에 금씨는 15여 호가 있다. 원고매마을에 5호, 처인구 고림동에 5~6호가 세거하고 있다.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에 선조 묘가 산재해 있었으나 2003년 석우리가 동탄신도시로 변화돼 구매마을 선영으로 이장하고 매년 양력 11월 둘째 주 일요일에 시제를 모시고 있다. 시제 때 50~60여 명의 종친들이 참석한다 한다.

용인 출신 중 금씨 가문 법조인으로 기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고, 서울대를 졸업한 후 변호사로 일했던 금병훈, 병훈의 아들이며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정치를 하고 있는 금태섭 변호사, 그리고 금현준 검사가 있다.

학계에는 금교은, 금세훈, 금병우, 금승원, 금상호, 금지수가 있으며 의사로 금승섭, 금혜정이 있다. 또 감정평가사 금만섭, 금현태가 있고 기업인으로 대림보일러를 경영하는 금광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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