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격의 거인인가?

요즘 젊은 층 사이에 일본의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 유행이다. 제목을 본 딴 ‘진격 할배들’, ‘진격의 애인’ ‘진격의 준하’ 등 패러디 제목들이 인터넷 상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애니메이션이 ‘진격’하는 이유를 분석하는 글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원작의 설정을 보자면 압도적인 크기의 거인이 느닷없이 나타나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사냥하여 잡아먹는다. 사람들은 칼과 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조직하고 높은 성벽을 겹겹이 쌓아 대항하지만 성벽 높이보다 더 큰 거인이 금새 등장해 벽을 허물고 난입한다. 군대는 거인들을 막기엔 너무나 역부족이어서 점점 더 안쪽의 성으로 도망만 칠뿐이다. 병사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민간인들이 성 안쪽으로 피신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정도이다. 무수한 병사들이 거인의 먹잇감이 됨으로써…

이 무기력함을 두고 오랜 저성장시대를 겪으면서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일본의 젊은 세대에 대한 메타포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일본만의 사정일까? 다른 비슷한 상황에 처한 나라나 지역은 없을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먹잇감으로 삼는 거인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애니메이션을 아무리 뒤져봐도 거인이 왜 출현했는지, 왜 인간만을 먹이로 삼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다. 거인은 기원과 존재의 비가시성, 신체나 정신을 위협하는 분명한 대상으로 실존하면서 절대적인 공포와 불안을 유발한다.

‘철인 28호’부터 ‘드래곤 볼’, ‘강철의 연금술사’까지 SF 기반의 애니메이션에는 항상 악당들이 등장하고, 세계정복이나 인간말살까지 그 목적도 뚜렷했다. 하지만 그렇게 인류사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영웅들이 등장하고 악을 물리쳤다. 처음에는 고정된 능력밖에 없던 주인공이나 악당들이 점차 신기술로 무장하고 이에 대항하여 경쟁적으로 진화하는 영웅의 캐릭터가 애니메이션의 정석이 된다. 그런데 <진격의 거인>은 다르다. 상대는 언제나 압도적이므로 이에 맞서 싸울 영웅은 없다.

거인에 대한 공포와 불안

공포와 불안은 신체와 정신을 위협하는 대상이 실재할 때 발생한다. 그 대상이 눈앞에 있을 때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보이지는 않으나 실재할 때 불안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불안은 여러 이드와 초자아의 욕구들과 현실원칙을 따르는 자아, 그리고 사회적 제약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며, 억압된 무의식적 충동들이 의식화되려는 위험에 대한 예시적 느낌을 말한다. 불안이란 심리적 위험에 대한 신호현상이다. 이러한 위험은 성장과정 중 피할 수 없이 나타나기 마련이며 위험한 상황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지극히 긍정적이기도 하다. 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더 적은 것과 같다.

그러나 공포와 불안을 유발하는 대상을 피해가거나 제거할 수 없다면 상황은 다르다. 거인의 입 속으로 던져지면서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거나 상대가 되지 않는 칼과 총으로 마지막 헛된 몸부림을 칠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나 국가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또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 근대사회를 거치면서 논쟁의 가운데 놓였던 질문들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생존 그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목에 밧줄을 걸고 옷을 벗어던지는 밀양의 노인들, 여전히 옥탑과 철탑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노동자들, 공공의료기관마저 폐쇄되어 갈 곳 없는 환자들에게 국가와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이란 모든 권력은 거인과 다르지 않다.

세계화 이후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먼 타향에서 가족과 떨어져 오직 돈을 대가로 여유로운 삶은 고사하고 비인간적인 처우와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거기다 이들에 대한 원주민의 모멸에 찬 시선은 서비스다. 유럽이나 북미의 경우 고도 성장기에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받아들인 이민자들 역시 처지는 비슷하다. 낮은 임금에 반인권적 상황을 감내할 수밖에 없거나 아니면 거리의 노숙인이 되어 범죄자로 전락하기 일쑤다.

제3세계의 노동자들이 세계를 떠돌면서 가정부가 되거나 불법체류 노동자가 되어 요리사나 허드렛일을 하는 실정은 저 로마시대 노예로 팔려와 온갖 주인을 위해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도 주인의 처분 하나에 생계수단을 잃는 상황과 신묘하게 겹쳐진다.
이들 열악한 하위주체들에게 세계화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기회나 조건이 아니라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착취의 사슬이다.

저항할 수도 더 나은 계급으로 상승도 할 수 없는 그런 삶을 강요하는 권력이 있을 때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거인 앞에 발가벗겨진 채 던져진 자의 공포와 무기력만이 있다.
이들에게 일상은 생존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거친 음식과 남루한 살림을 꾸려나가는 미천한 삶 뿐, 삶의 고귀함을 누릴 수 없다.

젊은 대학생들에게 시민교육을 강의하면서 거듭 느끼는 것은 약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능력이 매우 탁월하다는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이 사실이 우울한 까닭은 그들이 놓인 처지가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88만원 세대로 불리면서 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것이 꿈이 된 세대, 아무리 스펙을 쌓고 공부를 해도 유리천장에 갇힌 세대, 기성세대는 그런 그들에게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는 무책임과 무능력을 질타하기만 한다.
어쩌면 이들이 세상을 불가항력의 힘으로 자신들을 이리저리 휘둘러대는 거인으로 느낀들 하등 이상하지 않다.

거인을 거꾸러뜨리는 힘

최근 개봉한 영화 <월드워Z>에도 거인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불가항력의 대상은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는 좀비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는 대규모의 무리를 지어 폭풍처럼 내달리며 무차별하게 감염되지 않는 인간을 물어뜯는다. 그것도 건강한 사람에게만 반응한다. 먹잇감인 인간을 향해 돌진하는 좀비들의 속도와 포기할 줄 모르는 집착 앞에 산사람들은 고작 비명을 지르며 내달릴 뿐이지만 벗어나지 못한다.

이 영화가 다른 좀비를 다룬 영화와 다른 것은 그 스케일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어디에도 좀비를 없애거나 박멸하는 영웅적인 힘을 지닌 주인공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좀비들이 병든 신체를 지닌 비감염자를 무시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의 몸에 병원균을 주사해 살아남는다. 그렇게 개발된 백신을 감염되지 않은 신체를 지닌 사람들에게 주사한다. 좀비들은 더 이상 건강한 신체가 없음으로 무기력해진다.

악이 존재하면 항상 그것을 없애려고만 생각해 왔다. 선과 악의 이분법은 더 많고 큰 권력에 의지하여 기생충 약 먹듯이 악을 박멸하는 것밖에 모른다. 상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병든 자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악의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상상력은 빈약하다.

과도하게 권력이 집중된 상태를 불균등, 불평등 사회, 독재사회라고 부른다. 인류사회는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 문화권력, 교육권력 등 무수한 권력들에 힘이 집중되지 않게 하기 위해 민주적 합의와 절차를 고민하고 개발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의 불평등을 절대적으로 느끼는 하위주체에게는 여전히 권력은 언제든지 거인이 될 수 있거나 또는 항상 거인이었음을 주지해야 한다. 심지어 풀과 나무와 샘물에게도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파괴행위를 일삼는 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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