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는 천년왕조 신라를 지배해온 왕족이다. 고려와 조선을 통해서도 지배층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 삼국유사를 쓴 일연 등 수 많은 인물을 배출해 왔다.

경주김씨가 용인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조선 초기로 보이는데 주로 신갈과 죽전 일대를 중심으로 세거하기 시작해 차츰 거주 지역을 넓혀 갔으며, 용인에서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지역사회의 중심 씨족을 이루었다.

용인의 경주 김씨

 

1970년대부터 용인이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고 1990년대 들어 급속하게 도시화 되면서 인구가 급증하자 용인에 세거해온 경주김씨 이외에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들이 용인에 정착하면서 경주김씨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용인시 경주김씨 종친회가 결성되고 청년종친회, 장년종친회, 원삼분회, 백암분회, 포곡분회 등이 속속 결성돼 조상의 얼을 기리며 후손들에게 선조의 유훈을 전하고 있다. 해달 처인구 마평동 사무실에 모여 종회를 열고 있는데, 종회를 개최할 때마다 많게는 100여명이 모인다고 한다.

많은 성씨 가운데 용인에 종친회가 있는 경우는 많으나 면이나 동까지 분회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경주김씨의 경우 그만큼 용인시 관내에 거주하는 종친이 많다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다른 면에서 본다면 종친 간에 단결과 돈목(정이 두텁고 화목함)이 잘되고 있는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시원은 김알지, 경순왕 때 분파
 
우리나라의 성씨 가운데 김씨가 가장 많은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김씨가 제일 많은 대성이 만큼 본관도 가장 많다고 볼 수 있는데, 현존하는 본관은 36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김씨는 경주김씨와 김해김씨에서 분파된 성씨 들이다. 즉 김해김씨에서 분파된 김씨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김씨의 원류는 당연히 경주김씨가 되는 것이다.

경주김씨는 신라 4대 탈해왕(?~80)의 아들인 김알지(65~?)로부터 시작된다. 김알지는 금궤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삼고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였다고 한다. 김알지의 6세손인 미추왕이 신라 13대왕이 되면서 경주김씨로 처음 신라의 지배자가 되었고, 17대 내물왕 이후에는 아예 경주김씨가 세습을 하게 된다. 신라 58왕 가운데 38왕이 경주김씨일 정도이니 사실상 신라는 김씨 왕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후에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첫째는 마의태자 계통으로 알려진 순웅(順雄)의 후손이고, 셋째 명종(鳴鐘)의 후손이며, 넷째가 은열(殷說)의 후손들인데 이들은 본관을 경주로 하고 있다. 나머지 둘째 굉(鍠)의 후손들은 나주김씨로, 다섯째 석(錫)의 후손들은 의성김씨, 여섯째 건(鍵)의 후손들은 강릉김씨, 일곱 번째 선(鐥)의 후손들은 언양김씨, 여덟 번째 추(錘)후손들은 삼척김씨, 아홉째 덕격(德擊)의 후손들은 울산김씨로 분파(分派)되어 본관을 달리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주김씨는 마의태자의 후손으로 알려진 순웅을 1세조로 하는 대장군파, 셋째 명종을 1세조로 하는 영분공파, 넷째 은열을 1세조로 하는 대안군파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수십 개 파로 분류되면서 경주김문을 이루고 있다.

용인의 경주김씨 연원

용인의 경주김씨는 주로 수지구 죽전을 중심으로 한 상촌 김자수 선생을 1세조로 하는 상촌공파가 있는데, 상촌공의 손자로 태종 년간에 대사헌을 역임한 공평공 김영유를 중심으로 한 공평공파와 공평공의 손자 십청헌 김세필의 후손인 문간공파의 후손들이 주로 세거하고 있다.

신갈을 중심으로 한 경주김씨들은 계림군 김균을 중시조로 하는 계림군파 후손들이 대부분이며, 그 가운데서도 계림군의 10세손인 갈천공 김원립 후손들이 주로 세거하고 있다. 김균, 김자수 등은 모두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들이다. 상촌 김자수 선생은 자결로 고려에 충절을 지켰고, 계림군 김균은 조선에 협조하면서 개국공신에 봉해진 인물로 본관은 같은 경주김씨이지만 서로 상반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다.

상촌공의 후예 죽전의 경주김씨

죽전의 경주김씨는 고려의 충신이며 두문동 72현 중 한분인 김자수(1351~1413)가 아들 김근과 함께 한양에 가다가 태재고개를 넘으면서 “내가 이 고개를 넘으면 고려에 대한 충절을 꺾는 격이 된다. 나는 이곳에서 자결할 것이니 내 무덤에 비문을 세우지 말거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 곳에서 자결하니 아들 김근은 상촌의 묘소를 태재(광주시 오포면에서 성남으로 가는 고개로 현재는 터널로 이어지고 있음)에 모시고 묘하에 살기 시작하였다. 이후 자손이 번성하면서 태재에서 가까운 죽전지역까지 경주김씨 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이후 기묘명현의 한분인 십청헌 김세필(1478~1533) 선생의 묘를 죽전동에 모시고 후손들이 더욱 번성하면서 여러 파로 나뉘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죽전의 경주김씨 여러 파의 연원을 보면 태사공파(태사공, 인관)-상촌공파(상촌공, 김자수)-공평공파(공평공, 영유)-문간공파(문간공, 김세필)-참의공파(참의공, 김윤)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죽전에는 참의공파가 대종을 이루고 있으나 몇 세대만 남아있고, 1990년대부터 죽전지역이 도시화 된 이후 각지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상촌 선생의 후손들은 매년 음력 10월 초사흘 오포면 상촌공 묘하에서 시제를 올리고, 10월 초나흘에는 죽전동 십청헌 묘하에서 시제를 올리고 다음 날인 초 5일에는 참의공의 시제를 모시고 있다.

또 이들은 조상의 유훈을 연구, 정리, 보급하기 위해 상촌공파 사무실(광주시 오포 소재)과 문간공 사무실(수지구 죽전 묘하), 그리고 참의공 사무실(죽전동 농협 건물)을 두고 있다. 또 후손 교육을 위해 참의공파 종원 중 대학생에게는 매학기 100만원 상당의 장학금을 전달하고 고등학생에게는 1년에 40여만 원씩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특히 올해 10월에는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학술대회와 논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신갈 지역을 이끈 계림군의 후예들

 

▲ 김혁장군초상


신갈 인근의 경주 김씨들은 김순웅을 1세조로 하고 순웅의 13세손인 계림군 김균(1341~1398)을 중시조로 하며 계림군파라고 한다. 계림군파 중에서 계림군의 9세손인 갈천공 김원립(1590-1649)이 신갈지역에 이주하면서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으며 이들을 경주김씨 갈천공파라고 한다.

갈천공 김원립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면서 국난극복을 호소하는 교서가 내려오자 의병을 모집,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며 과천에서 많은 적을 사살한 충신이다. 그의 충절비가 현 기흥구 구갈동 성지초교 앞 김혁 공원에 세워져있다.

문중에는 갈천공과 관련해 갈내, 즉 신갈 일대의 지명이 생겼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갈천공이 이곳에 이주해 살았기 때문에 갈천 또는 갈곡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900년대 행정지명을 변경할 때 갈천공이 살던 곳을 구갈, 새로 형성된 마을을 신갈, 신갈 아랫마을을 하갈, 하갈 윗마을을 상갈이라는 ‘갈’자가 붙은 지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갈천공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넷째 아들의 후손은 충청도, 둘째와 셋째의 후손들은 신갈 인근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후손들 중 유명 인사로 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장을 역임한 김호식, 1960년대 용인 국회의원을 지낸 김윤식, 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내고 민주화운동의 대부인 김근태. 자유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낸 김학원, 현 용인시장 김학규, 현 기흥구 국회의원 김민기,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공헌한 김학민 등 다수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 경주김문을 빛내고 있다. 신갈일대에 살고 있는 경주김씨를 용인지역에서는 갈내(신갈을 일컬음) 김씨라고 할 정도로 신갈과 용인일대에서 중심 가문의 위치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 성재 김학조(1875-1956)를 들 수 있다. 김학조는 당대 명유 서야우의 문인으로 1891년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신갈의 유지로 지역교육에 공헌한 용인일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인물이다.

선생은 당대 한수 이남에서 최고학자로 명망이 있던 외숙인 맹보순(1862-1933)을 초빙, 신갈에서 한학을 가르치게 하다가 학동이 늘자 현재 마북동에 있는 용인향교에 들어가 한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 때 배출한 인물로 삼일운동 당시 파고다(탑골)공원에서 만세를 주도한 어대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영선, 그리고 만주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양성에 힘쓴 김혁 장군이 있다.

또 용인향교에서 맹보순이 명륜학교(1906년)를 개설, 교육할 때 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 용인에 근대교육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1920년대 유림으로서 충렬서원을 재건하는데 역할을 하였고, 서원 인근에 모현 강습소를 여는 데도 도움을 주어 용인의 근대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오석 김혁(본명 김학소 1875~1939)은 용인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무관학교를 거처 육군 참위로 근무하다가 군대해산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양성에 진력했으며 3,1운동에도 참가해 신갈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노력하다가 신민부를 결성하고 신민부 산하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교장(부교감 김좌진)에 취임해 독립군양성에 노력하다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복역 후 출옥할 때 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거물이 출소함에 총독이 자동차 6대를 줄 터이니 생업에 몰두 하십시오.”라고 했다고 하나 이를 거절하고 가난하게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후손들은 입향조 김원립과 김혁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흥구 구갈동에 두 분의 비를 세웠고 용인시에서도 선생의 공적을 기려 비가 있는 공원을 ‘김혁공원’이라 명명하였다.

 

 

 

 

 

 

 

▲ 김세필-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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