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수

일제 치하와 해방 공간, 그리고 건국과 조국 근대화에 이르기까지 격동으로 일렁였던 현대사. 그 속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란 결코 시대와 떨어져 자유로울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가 하나 있다. 독립항일투사이자 영일 정씨(迎日 鄭氏) 포은 정몽주의 24대 직계종손인 정철수(1921∼1989)선생의 삶이 그러하다.

명문가의 종손으로 태어났기에 온 가문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성장했던 어린 시절, 일제 치하 말기 학도지원병 강제징집과 탈출, 민족 독립을 위한 조선의용군 활동, 해방 후 중국 고위직 진출과 노선 투쟁에 위한 숙청과 복권, 41년만의 고국 방문과 영구 귀국으로 이어진 그의 인생 편력은 가히 파란만장하다.



가문을 짊어질 종손의 젊은 시절

고려왕조의 대학자이며 충신인 정몽주의 24대 종손인 정철수는 1921년 아버지 정의열과 어머니 경주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낳고 자란 모현면 능원리는 정포은((1337∼1392)선생의 선영이 있는 곳으로 그의 후손들이 수백 년에 걸쳐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가는 마을이다. 명문가의 집성촌, 그 중에서도 종손이었던 그는 당연히 주위의 특별한 관심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 치하였지만 일본인 지방 수령이 부임하면 말을 타고 종가집에 인사를 오는 모습을 보기도 했던 그는 영특하기도 해 보성전문(현 고려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졸업장을 받을 수가 없었다. 1943년, 이미 전장은 중국을 거쳐 동남아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하와이 진주만 폭격까지 감행한 일본은 ‘1억인민 총동원’이란 구호 아래 지원병, 징병, 학도병, 징용, 애국부녀회 등의 이름으로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있었다. 학도병들을 모집하는 사업에는 최광수, 윤치호, 최재서, 최남선 등까지 나서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로 집요했다.

청운의 꿈과 대종손으로서의 의무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건만 시대적 광풍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대학졸업을 몇 달 앞둔 1943년 12월 하순 어느 날, 그는 갓 결혼한 아내와 뱃속의 아이 그리고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한 채 학도지원병을 실어 나르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 ‘하여간 죽더라도 일본 놈의 대포 밥이 되지 말고 조선독립을 위해 조선사람답게 똑똑히 죽자’던 생각은 어느 새 ‘피 값이라도 하고 죽어야지’로 바뀌었고 다시 ‘전선에 나가면 도망치자’는 생각으로 굳어졌다.”가족들을 괴롭히는 통에 학도병 강제지원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선에서 탈출해, 오히려 왜놈들과 싸워 조선 독립을 앞당기자는 굳은 결심을 이미 그는 열차 안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군 탈출과 조선의용군 입대

그가 도착한 곳은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대륙 산동성 제남이었다. 황군(皇軍)중에는 조선인만 70여명이 포함돼 있었다. 훈련 틈틈이 탈출 계획에 골몰하던 그는 자신이 불침번을 서던 어느 날, 미리 모의한 두 명의 학도병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병영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병영경계를 벗어난 그는 낯선 이국 땅을 헤매며 천신만고 끝에 한 밤중 70리 길을 뛰어 항일투쟁 근거지인 태항산에 이르렀다. 태항산은 그 시절에 강력한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맞서던 조선의용군과 중국팔로군의 치열한 항일전투 현장이었다. 이미 1941년 조선의용대와 중공군의 ‘조중연합군’이 일본군과 격돌했던 ‘태항산 전투’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정철수는 일본 황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팔로군 장교 고용(高勇)에 의해 구출돼 무정(본명 김무정, 1905∼1951) 등 많은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들의 구국정신에 감화돼 떳떳한 항일투사로, 그곳에 있는 조선의용군 대오에 참가했다.

그 즈음 정철수는 ‘고철(高哲)’이란 이름으로 개명을 한다. 거기엔 사연이 있다. 그가 학도병으로 참전하기전, 일제는 징병제를 앞두고 한 사람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인석’이란 학도병이다. 황국과 대동아 공영권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며 반도 청년들이 나아갈 방향이며 본보기라고 추켜세웠던 그 인물은 실제는 포로가 돼 있었다.


‘고철’로 살아온 중국에서의 40년

이처럼 일제에 의해 악용되는 것을 막고 신분 노출을 피하기 위해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고쳤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이름을 바꿀 것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재생의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왜군 병영을 탈출해 처음 만난 팔로군 간부 고용(高勇)의 앞 자인 ‘고’자를 가져오고 원래 이름인 철수에서 돌림인 ‘철’자를 사용한 것이다. ‘고철’은 그가 파란만장한 중·장년기 인생 전반을 보냈던 중국에서의 이름이자, 그 시기 그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1944년 9월, 태항산맥에 있는 화북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활동을 하면서 해방을 맞았지만 민족주의자이자 제국주의에 맞서 국제주의 전선에 나섰던 그는 곧바로 귀국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미 조중연합전선의 일원으로 중국 내전에 참여하고 있었고, 1946년엔 동포들이 몰려 살았던 길림성 동부군구의 정치부주임이 돼 있었던 것이다. 군구란 크게는 6개 사단, 적게는 3개 사단을 총괄하는 지휘체계로 만주지역인 길림성, 요녕성, 흑륭강성을 관장하고 있었다. 정치부 주임은 사령관과 총참모장에 뒤이은 서열 3위의 고위직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오로지 살기 위해 희망을 안고 중국으로 몰려들었던 조선인들, 그리고 해외 항일투쟁에 나서기 위해 조국을 떠났던 애국자와 그 가족들은 이미 그 땅에 깊이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내 나라 사람들이 있는 이상 그는 쉽게 뜰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에 그는 1947년 군 생활을 접고 조선인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뛰어든다. 길림시 조선중학교를 직접 나서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민족정신을 심어주고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교육에 몰두하며 새로운 영역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의 정치환경은 그를 그대로 두질 않았다. 1957년, 중국 공산당내 반우파 투쟁(反右派 鬪爭)에 연루, 화룡현 화룡공사로 유배를 당하고 만 것이다. 당시 이 정쟁에 휘말려 고초를 당한 이들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현재 중국을 이끌어 가는 지도부들이 거의 망라된 것으로 노선투쟁을 빙자한 권력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새로 꾸린 가정에서 큰아들 내정(45)이 태어났지만 그의 인생 부침은 그 폭이 컸고 그 만큼 고통도 적지 않았다.

복권도 잠시, 또 다시 1964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다시 하방된 그는 숙청되고 말았다. ‘노동개조, 사상개조’라는 명목으로 연변의 인쇄공장에서 보일러공 생활을 하며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런던 어느 날, 군 시절 예하부대 부하였던 조선인 출신 조남기 길림성 성장(당시엔 자치주 주장으로 좌천상태였다. 그는 후에 인민해방군 후군부장으로 조선인 출신 중 최고위 장성에 올랐던 인물이다.)이 그를 찾았다. 얼마나 고충이 많으냐며 눈물을 흘리고 술 한잔을 나누고 떠난 다음날, 고철은 유배에서 풀려 연변대학 일본어과 석좌교수로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


다시 고국 땅으로

그 후 줄곧 연변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열중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틈틈이 아들 내정을 불러놓고 조상에 대한 내력이며, 종손으로서의 위치를 잊지 않도록 강조했다.

세월은 흘러 1983년이 됐다. 당시 한국과 중국은 국교정상화 훨씬 이전이어서 사실상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연변 등 조선족 동포들은 고국의 소식을 알고 싶어했고 라디오 방송은 그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특히 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의 반향은 컸다.

그러던 어느날 방송에 노모가 ‘정철수(고철)’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찾아갈 수 없었던 조국, 그러나 이산가족 더구나 종손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어머니와 종중의 도움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무려 41년만에 그리던 조국 땅을 밟게 됐다.

그는 조국 땅에 들어오기 전 아들, 내정을 불러 앉혔다. 그리곤 중국속담 하나를 써 보여주었다. ‘樹高千丈 落葉歸根’‘그 아무리 높은 나무라 한들, 결국 낙엽이 돼 뿌리의 거름이 되고 만다.’는 글귀는 이미 고국으로 귀향하겠다는 그의 마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곤 중국 인명사전인 ‘사해(辭海)’를 펼쳐 포은 정몽주 선조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1984년 가을, 1차 고국 방문에 이어 1985년 봄, 그는 영구 귀국했다. 항일운동가이자 중국혁명가에서 정포은 선생의 24대 종손으로, 고철에서 다시 정철수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는 귀국 3년만인 1989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고향 땅에 잠들었다. 68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굴곡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정철수 선생 연보

·1921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71번지에서 정의열과 경주김씨 사이에서 태어남
(정포은 선생의 24대 종손)
·1943년 12월, 보선전문대(고려대 전신) 3년 재학 중
일제의 학도지원병령에 의해 강제 징집
·1944년, 중국 산동성 제남의 황군부대에서 동료2명과 함께 탈출, 팔로군에 투항
·1944년 3월25일, 조선독립동맹 태항분맹원으로 입맹
·1944년 5월, 이름을 ‘고철(高哲)’로 개명
·1944년 9월, 화북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활동
·1946년 길림성 동부군구 정치부주임
·1947년 길림시조선중학교 설립 및 초대 교장 취임
·1957년 중국 공산당내 반우파 투쟁에 연루, 화룡현 화룡공사로 유배
·1957년 큰아들 내정 출생
·1964년 문화혁명때 다시 숙청돼 연변 인쇄공장에서 보일러공 생활
·1965년 연변대학 일본어과 석좌교수로 복권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에 의해 고국의 노모로부터 찾는다는 소식 들음
·1984년 가을, 1차 고국 방문
·1985년 봄, 영구 귀국
·1989년 68세 나이로 사망, 고향 땅에 묻힘

증언/ 정내정(45·정암통상 대표, 정포은 선생 25대 종손)
참고자료/ 정철수 「나의 청춘」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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