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1920년대 만주지역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했던 ‘용인의 인물’오석 김혁장군이 4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된 가운데 용인과 서울 등지에서 그를 기리는 각종 기념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오는 19일부터 김혁 장군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오석 김혁장군 기념사업회」와 보훈처 그리고 용인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 등이 함께 하는 이번 행사를 앞두고 그의 일대기를 간추려본다. 내용은 수원대학교 사학과 박환교수의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김혁장군, 독립운동에 바친 인생 역정

김혁의 본명은 김학소이다. 1875년 10월 6일,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출생했다. 1898년 6월 22일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입학했고, 1900년 1월 7일 대한제국육군문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로 임명된 이후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 이후 절치부심하던 그는 3.1운동이 전개되자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단신으로 1919년 5월 만주 무송현으로 망명, 그곳에서 흥업단에 가입하여 부단장으로서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이후 김혁은 흥업단을 떠나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는 북로군정서사관연성소 제1회 졸업식이 1920년 9월 9일 군정서 본영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자 축사를 하여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3월 10일 영안현 영안성 내에서 신민부를 조직하게 된다. 이때 그는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나이 50세, 항일 경력, 인품, 통솔력 등이 다양하게 검토되었을 것이다. 또한 신민부에서 군인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자 교장에 임명되어 부교장 김좌진 등과 함께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성동사관학교는 전후 500여명의 졸업생을 내어 독립군 간부로서 활동하게 하였다. 학교 운영에는 그의 대한제국무관학교 시절의 교육 경험과 항일투쟁 경력 등이 큰 기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집행위원장이었던 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을 다니며 운동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독립운동 근거지인 각 지역을 탐방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고려혁명자후원회를 조직, 그 위원장으로 선출돼 책임을 맡기도 했다.

이처럼 북만주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김혁은 불행히도 1928년 1월 25일 중동선 석두하자 역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김혁은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언도받고 7년여의 수형생활 끝에 1935년 5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으나 옥고로 인한 병환으로 인해 1939년 4월23일 용인 농서리 자택에서 순국했다.




##### 4월의 독립운동가 김혁장군 추모행사 #####


◇오석 김혁장군 독립운동 기념비 이전 제막식

일시: 4월 19일(금) 오후 4시
장소: 기흥읍 강남대학교 교문 부근
주최: 오삭 김혁장군 기념사업회, 경주 김씨 갈천공파 종회

◇오석 김혁장군 추모 음악회

일시: 4월 19일(금) 오후 7시
장소: 기흥읍 구갈리 강남대학교 대학교회
출연: 안치환, 용인심포니오케스트라 외
주최: 오석 김혁장군 기념사업회
후원: 동아일보, 국가보훈처, 용인시, 경기문화재단, 생명보험협회

◇오석 김혁장군 추도식

일시: 4월 23일(화) 오전 11시
장소: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주최: 오석 김혁장군 기념사업회 경주김씨 갈천공파 종회 (※전세 버스 운행)

◇오석 김혁장군 공훈 선양 학술강연회

일시: 4월 23일(화) 오후 2시
장소: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관 강당
발표자: 박환(수원대 교수)
주최: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
후원: 국가보훈처, 오석 김혁장군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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