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돼 버렸지만, 한때 조선일보 주필을 지냈던 고 선우휘 선생의 칼럼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뒤 젊은 선우휘씨와 그의 친구들이 서울 종로 거리를 걷다가 술에 취한 한 패의 미군병사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미군병사들이 느닷없이 이들에게 주먹을 휘둘러 어쩔 수 없이 인근 종로경찰서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더욱 기막힌 것은 미군들이 경찰서 정문까지 쫓아와 “비겁한 놈들, 어서 나와라!”며 소리소리 지르더란 것이다. 선우 선생은 그때 왜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겠다며 미국인의 돌출적 호전성을 꼬집고 있었다.

미국인에 대한 이런 이해 못할 문화적 괴리감은 그들의 영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한 두 명이 싸우기 시작하면 금새 싸움은 확대되고 이들과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두 패로 나뉘어 치고 받고 때려부수는 모습을 우리는 그들의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단순할 정도로 정의의 반대편에는 불의만 존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미국인들이 프랑스식 ‘똘레랑스’를 자선이나 위선으로 간주하는 것도 모두 이에 기인한다. 이런 자기위주의 당당함은 미국을 세운 청교도적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힘과 정의의 이야기만 나오면 미국인들은 하나님을 찾으며 미국은 언제나 자비와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굳게 믿는다. 따라서 미국이 옳다고 판단하는 것이 신의 뜻이며 정의이고 다른 나라도 이를 따르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다는 게 그들의 논리다.

경쟁력이 농업을 살린다

지금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화 또한 이런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세계화란 국가간의 모든 무역장벽을 없애고 국가간, 기업간, 계층간에 초 이전 투구식 무한경쟁을 벌이자는 얘기다. 이는 마치 한 동물원의 울타리를 한꺼번에 열어놓아 그 안에 있는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그대로 풀어놓은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힘센 맹수들이 약한 짐승들을 잡아먹게 되듯 이른바 약육강식을 바탕으로 한 힘의 논리가 세계 경제질서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경제질서는 절대생산 추구를 유발해 지구환경을 파괴하고 자원을 약탈하는 경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세계화는 실업의 대량화, 빈부격차의 확대, 기업의 합병 및 파산, 외국자본의 횡포, 국가주권의 위축, 개인존중의 멸시 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제경쟁력을 갖춘 업종만 살아남고 경쟁력이 약하면 도태되는 힘의 절대가치화는 한국의 농업 또한 예외가 아니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다자간 무역협정이 체결되고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함에 따라 농산물 협정도 농산물에 대한 ‘예외 없는 관세화’‘최소시장 접근방식’‘농업분야에 대한 각종 보조금 철폐’ 등으로 농산물의 시장 개방을 촉진시키고 있다.

세계화란 결코 윤리적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 농민도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결국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화란 어차피 21세기의 거부할 수 없는 코드이며 필연적인 조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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