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아리스토텔러스는 “인간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갈파했다. 행복은 인생의 꿈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의 귀일처(歸一處)가 행복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시인 칼부체의 말처럼 저 멀리 행복이 있다기에 찾아가 보았지만 결국 찾지못하고 돌아왔다는 얘기는 시인만의 슬픈 독백이 아니다.

시인은 행복의 파랑새는 언제나 내 마음 가운데 있다고 표현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기준을 행복과 불행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황금만능주의 왜곡된 사회통념이 가져다준 가치관이겠지만 그로 인해 다원화된 산업사회의 빈인빈 부익부의 상대적인 행태는 사람과 계층간의 갈등으로 표출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칼마르크스는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데 있지 않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갖지 못했을 때는 하나를 가지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를 갖게 되면 두 개 이상을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고 한다.

우리보다 앞선 삶을 살다간 현자들은 익히 우리에게 “소유와 무소유”는 인간 삶의 행복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가르침을 남겼다. 성경에 이르듯 행복은 마음의 평안과 자족함을 두는 것이라고 했다.

일회성 인스턴트 식품과 기계회된 생활공간, 삭막한 콘크리트 벽돌담에 갖혀 있는 현대인들의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고 분명 마음에 있음이 확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강팍한 마음을 일깨워 행복을 찾게 해주는 한 단면이 문화예술의 역할이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용인에 처음 이사온 사람들 중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구동성으로 교육과 문화예술 분야가 낙후된 곳이라는 불편함을 털어놓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몇 해전에 예총이 태동되어 문화예술 활동이 이전보다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시민들이 체감할 정도의 공연문화는 형성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지은지 10여년이 지난 문화예술회관의 규모와 공간의 쓰임새도 지금의 용인시 규모와는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가정의 달, 청소년의 달이라고 일컫는 5월을 마감하는 지난주에도 가족이나 청소년을 위한 행사보다 민방위 교육장으로서 그 가치를 빛내고 있는 용인시 문화예술회관의 현주소였다.

그도 또한 시민을 위한 한 방편이겠지만 예술회관의 그 본래 취지에 맞게 공연문화의 활성화로 시민들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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