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 소당(小唐) 이재관(李在寬)

▲ 총석정도.

조선 후기 화단에 걸출한 인물이 용인에서 배출되었다. 소당 이재관이 바로 그 사람이다. 소당의 그림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그의 영모화(翎毛畵)는 일본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어서 해마다 동래관(東萊館)으로부터 구해갔다고 할 정도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동안 용인에서 간행된 시사나 군지, 인물집 등 각종 문헌에 빠짐없이 그를 용인사람으로 지칭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묘가 용인관내에 전하지 않아 정말 용인에서 배출된 인물인가에 대하여 일말의 의구심을 품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중 용인이씨 문중에서 간행하는 ‘용인이씨종보’(제65호. 2002년 11월1일자)에 서울여자대학교 이원명교수(사학과, 박물관장)가 소개한 ‘용인의 인물’시리즈에 23번째로 소개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용인이씨 문중의 사학자가 용인의 인물이라고 적시 했다면 그런 것으로 알 일이지 여기에 더 이상 무슨 이의를 달게 없지를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문제이다. 바로 우리 곁에 이처럼 훌륭한 역사적 예술인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진가를 공유하지 못했다.

안산시에서는 단원 김홍도의 호를 따서 ‘단원구’라는 구명을 붙이고 있는 것과 대조해 보면 우리 용인사람들이 우리고장의 고유한 유서에 얼마나 둔감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던가?

물론 소당 이재관이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화원으로서 삼원(단원, 혜원, 오원)이나 삼재(겸재, 현재, 관아재)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이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대가로 평가받고 있는데 용인에는 그의 이니셜을 딴 도로 명 하나도 배려되지 않았으니 이를 보아도 우리의 유서를 가꾸려는 마인드 면에서 안산시와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선후기 화단 걸출한 인물로 용인이씨

소당 이재관은 정조 7년(1783)에 출생하였다. 자는 원강(元綱)이며 임진왜란 때의 명장 이일장군의 8세손이고 부친 언필(彦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초년은 불운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하여 혼자서 습득한 솜씨로 그림을 그렸고 이것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용인의 어느 곳에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살던 집 근처의 분위기를 야항(野航) 김례원(金禮源)이란 사람이 시로 읊었다.

“흰돌과 숲에 둘러싸인 푸른 사립문, 그윽이 핀 꽃에 우는 새는 맑은 햇빛을 희롱하고, 등짐에 힘겨워하는 아이놈을 보고 웃으면서, 또한 그대 집에 이르러 그림을 얻어 돌아가네 - 白石樹邊祿樹扉 幽花啼鳥弄晴暉 笑看一擔 肩重 又到君家乞畵歸” ‘한국서화인명사서’에 기록된 이 한수의 시에서 소당이 살던 집 정경이 눈에 보이는 듯 느껴진다.

그가 사숙한 스승이 없었다는 것이 조희룡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있는데 “그림을 따로 배우지 않았으나 뛰어난 재주로 자가(自家)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문인화풍의 화가인 이유신(李維新)의 조카’라고 되어 있어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견해도 있지만, 조영윤의 ‘서화인명사서’에는 “화(畵)는 사숙(私淑)한 바 없으나 고(古)에 물흡(沕洽)이니 거의 천수(天授)라 할지로다. 운연초목(雲烟草木)이나 비주잠잠(飛走蠶潛)이 다 같이 정묘(精妙)에 들고 더욱 전신조사(傳神照寫)에 장하더라. 상하백년에 여차한 필이 없더라”하였으니 상하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하는 희대의 화가였음이 강조되고 있지를 않겠는가?

그의 작품 중에 추사 김정희의 제발이 들어있고, 실제로 화풍상으로도 이인상이나 윤제홍 등의 화풍과 유관한 면모를 보이고 있어서 궁중 화원이면서도 문인화 풍의 세계를 추구하였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화조(花鳥)나 초충(草蟲), 물고기 그림에도 뛰어났으나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다.

‘서화 인명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의 어진 1본을 영흥부선원전에 봉안하였더니 헌종 병신년 겨울 도적 때문에 훼손된 바 있다. 정유년 봄에 원본을 경희궁에 이봉하고 이재관에 명하여 중무(重撫)시켜 본전에 환안(還安)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때가 1837년이었고 이의 공으로 이재관은 등산첨사(登山僉使)가 되었다. 태조의 어진을 그렸다면 궁중화원중에서도 최고 정상급 화원으로 인정받지 않고는 그 경지에 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필자가 용인문예회관에 용인향토사료관 설치 실무를 맡아 전시 내용물을 마련할 때 소당의 작품인 송하처사도(松下處士圖) 사본과 오수도(午睡圖) 사본을 구입한 것이 지금도 전시되어 있다.

▲ 송하처사도 “백안으로 타 세상 사람을 본다”라고 쓴 탈속경지의 화제(畵題)가 있다.


홀로 그림 익혀 작품 팔아 홀어머니 봉양

송하처사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으로 이재관을 대표하는 그림이기도 한데 이 그림에 대하여 전 국립박물관장 최순우 선생이 평하기를 “소당 이재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일점 속기가 없다는 말이 그대로 실감이 난다.

활달하면서도 허세가 없는 수묵채의 붓 자국들은 일종의 너그럽고도 해맑은 분위기를 자아낼 뿐 더러 그의 작품마다 거의 등장하는 탈속한 처사의 모습에는 마치 소당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반영된 것 같아서 소당이라는 미지의 화가에 대한 담담한 정념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소당은 원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선생도 없이 이 같은 경지를 이룬 분이라 하니 이분의 그림 솜씨를 보아도 가히 천재라 할 만 하고 맑고 담담하게 예술의 길을 헤쳐 나온 선비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당 예술의 진면목을 보여 준 인물, 풍경화들의 면면을 보면 이 분은 기교적인 자세한 그림에는 성품이 잘 맞지 않을 듯싶어 보이지만 실상 소당은 초상화에도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여서 전후 백년을 통해서도 그만한 솜씨가 없었다고 일컬어진 분이기도 하다. 객기가 없는 이 그림의 풍김 속에서 우리는 한국의 사도(士道)와 그 사도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보는 듯싶다”고 하였다. 

필자는 평소 이 그림에 매혹되어 용인의 인물총람 표지의 삽화로 사용한 바도 있는데 소당은 이 그림을 그리고 난 후 ‘백안으로 다른 세상 사람을 본다-白眼看他世上人’라는 화제(畵題)를 썼다. ‘속세의 사람들을 백안시한다’라는 화제는 중국당나라 왕유(王維)의 시를 소재로 다룬 그림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화제가 이 그림의 전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세속의 어떤 유혹이나 구속에도 구애되지 않는 고고한 선비의 풍모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미술평론가는 이 작품에서도 “소나무와 인물을 전경(前景)에, 암석을 중경에, 원경 없이 배치하고 있다. 세사에 초연한 선비의 고고한 정신에는 자연과 인간의 호흡이 일체가 되어 피아(彼我)를 구분할 수 없는 혼연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림의 노인은 세상을 백안으로 보고 있지만 뒤에 있는 어린 동자는 노인의 등 뒤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온갖 풍상을 겪은 낙락장송에는 세속을 견뎌 낸 무게가 실려 있는 듯 가지가 휘어져 있다. 사람도 늙고 장송도 늙었지만 어린 동자가 또 다음 세대를 이어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듯, 물끄러미 그림에 빠져들다가 보면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가 보이는 듯하다. 나는 여기서 소당의 깊이 있는 그림철학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송하처사도 ‘피아 구분없는 혼연의 경지’

그림의 왼쪽에 소당을 ‘화신(畵神)’이라 지칭한 글이 있다.

“소나무는 구골이요, 돌은 완골이요, 사람은 오골이다. 이와 같이 되어야 바야흐로 무릎을 안고 길게 휘파람하며 한 세상이 눈에 차갑다는 뜻이 스며있게 된다. 소당은 그야말로 화신이구려, 나한테 이것을 만들라고 한다면 솔은 노송이요, 돌은 괴석이요, 사람은 허황된 사람일 따름이니 이는 겉만 그린 것이라 - 松是 骨 石是頑骨 人是傲骨 然後方帶得抱膝長嘯 眼冷一世之意 小塘 其眞畵神者乎 使我作此 松老石怪 人詭而耳 此寫形者也”하였다.

이 화찬을 지은 사람은 소당과 절친했던 호산 조희룡의 글로 그림의 깊은 의미를 그려냈음을 밝히면서 소당의 그림 실력을 높이 평가한 내용이다.

이렇듯 이 한 폭의 그림에는 화제와 화찬과 소당의 그림세계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명화로 그 크기는 138.5×66.2cm인데 똑같은 크기로 복제된 그림이 문예회관 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이재관의 오수도(午睡圖)는 가까운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물론 이 그림 사본도 향토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치기가 일쑤지만, 이 그림이 용인이 배출한 천재적인 화가 이재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한국화의 멋과 여유와 여백의 미를 알았다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인 것이다.

이 오수도를 보고 있노라면 사대부의 체통도 훌훌 벗어 던진 채 책 더미에 기대어 늘어지게 한숨 곯아떨어진 모양에서 무료하고 따분한 분위기가 잠 속에 빨려 들고 있는 듯하다. 우측 상단에 기록된 화제를 보면 “새 소리 오르내리는데 낮잠이 한참이로다. -禽聲上下 午睡初足”라고 적었다. 배경의 산은 생략되었지만 초당(草堂), 소나무, 바위의 스스럼 없는 필치에서는 이재관의 원숙한 경지가 보이며 오수를 즐기는 선비와 차를 다리는 동자, 그리고 두 마리 학의 표현에서는 이재관의 탁월한 사생력(寫生力)이 돋보인다.

▲ 오수도(午睡圖). 사대부의 체통도 훌훌 벗어 던진 채 책 더미에 기대어 늘어지게 한숨 곪아떨어진 모습. 무료하고 따분한 분위기로 잠 속에 빨려 들고 있는 듯하다.

 신선한 화풍, 김홍도 이인상에 영향 받아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담채의 설채(設彩) 또한 부드럽고 맑다. 그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는 언제나 이런 처사(處士)나 파초선인(芭蕉仙人) 등을 빌어 표현하였는데 소당은 그것에 어느 정도 자신과 신념을 가졌는지 관지(款識) 및 도인(圖印)은 문자인(文字印)으로 필하무일점진(筆下無一點塵) -즉 붓 아래에 한 점의 티끌도 없다-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을 찍었다. 인물의 묘사와 서체(書體)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이 느껴진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중앙일보에서 간행한 ‘한국의 미’ ‘산수도 하편’의 도판해설집에서는 송하처사도와 같은 소재는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이 즐겨 그린 것이고, 소나무의 휘늘어진 가지의 기법에서도 능호관의 영향이 엿보인다고 하였고, 이어 “더욱이 천지석벽도(天池石壁圖)를 보면 암벽의 주름이 완전히 능호관의 독특한 기법과 일치하여 소당이 그로부터 받은 영향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중략- 그 결과 이 그림은 능호관의 깔끔하고 차가운 문기와는 달리 투박하면서도 신선한 화풍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능호관 이인상이나 김홍도와 같은 사람들의 영향도 가미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인화나 풍속화의 대가들과 견주어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당의 작품 수준과 명성은 ‘상하 백년에는 여차한 필이 없을’ 정도의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던 인물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용인이 배출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인물 재조명·작품 공유 아쉬워

70년대, 포곡읍 신원리에 살고 있던 용인이씨 문중의 이 모양이 보건소에 다닐 때, 집에 그림 병풍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보여 줄 것을 벼르고 벼르다가 하루는 이양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갔으나 그의 모친께서 얼마나 아끼셨던지 딸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나에게도 그 병풍을 보여주시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날 밤, 제사를 지내고 마루에 놓아둔 사이 도둑이 들어 병풍을 훔쳐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가까운 친척 이광섭씨가 전하는 말로는 그 그림이 군선도(群仙圖)였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소당의 그림이 용인이씨 문중에 딱 한 점 전해졌던 것인 만큼, 그 그림을 보지 못했던 것이 지금까지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당시에 차라리 그림이 공개되어 널리 알려졌더라면 오히려 보호 받을 수 있지 않았을 런지  그저 미련이 남는다.

결론적으로 앞으로 남은 것은 용인이 낳은 이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유서를 재발견하고 많은 시민이 이를 공유하고 용인의 긍지로 삼을 만한 기회를 창출하는 일인데, 이런 일은 용인미협이나 동호인들, 아니면 용인의 역사박물관이 건립되어 용인의 위상을 정립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언제쯤 용인의 ‘문화 자치시대의 전성기’가 도래할지, 그게 요원한 일인 것 같다.
/프리랜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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