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출신이자 죽어서도 용인 땅에 묻힌 석농 유근(1861∼1921) 선생이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이달초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유근 선생을 이 같이 선정해 발표했다. 선생은 1861년 9월 26일 용인시 남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석농은 호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지만, 근대적 사고와 이념을 수용한 개신 유학자였다.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목격하면서 근대 문물의 수용을 통한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감한 탓이었다.

1894년 상경하여 이듬해 탁지부 주사로 김홍집 온건 개화파 내각에 참여한 것도 그런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인해 관직을 사임한 뒤에는 오직 조국 근대화와 자주화를 위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1896년 독립협회에 참여한 뒤, 각종 연설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주권 수호와 민권 신장 운동을 전개하다가 잡혀 고초를 겪었다. 1898년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이후 주필, 논설위원,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배양에 노력하였다.

선생이 황성신문에서 활약하던 때인 1905년 11월 일제는 무력으로 광무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국권을 강탈하였다. 이에 선생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 대신들과 일제 침략자들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광무황제와 각부 대신들을 협박한 사실을 신문에 게재하여 그 간악함을 폭로했던 것이다.

특히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을사조약」을 폭로,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유명한 논설을 쓸 때, 그가 너무 격분한 나머지 끝을 맺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장지연과 사돈관계로 절친했던 선생이 그 후반부를 끝내고 밤새껏 인쇄하여 배달함으로써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빛나는 논설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선생은 휘문의숙의 숙감과 숙장 등을 연이어 맡아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그러다가 선생이 다시 언론계로 돌아와 황성신문의 제5대 사장에 추대된 것은 1907년 9월 17일이었다. 이후 선생은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6월 11일까지 약 3년간 황성신문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함양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아울러 대한자강회·대한협회·신민회 등 계몽운동 단체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휘문의숙의 숙감·숙장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초등본국역사<사진> 등 역사 교과서를 집필 편찬하여 청년 학생들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정립하는데 힘썼다. 경술국치를 전후해서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최후까지도 정교의 중책을 맡아 교무 발전과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조선광문회의 고전 간행 사업에 참여하면서 민족문화의 보존과 발전에 노력하였다.

더욱이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에서도 중앙학교 교장으로 민족 교육에 종사하고, 비밀결사인 조선산직장려계를 지도하면서 민족역량을 키워갔다. 특히 3·1운동 중에는 국민대회를 통하여 한성정부를 선포하는데 동참함으로써 민족정권 수립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창간을 발의하여 그 제호를 지었으며, 양기탁과 함께 편집 감독으로 민족언론 창달에 노력하던 중 숙환으로 1921년 5월 20일, 환갑을 눈앞에 두고 서거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해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0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자료제공·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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