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형문 시민기자(중앙대 음대 강사)
음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강형문의 음악사 산책을 통해 음악이야기를 작성하다보면 여러 생각에 잠긴곤 한다. 다음 주엔 무슨 내용의 글을 쓰면 좋을지에 대한 내용으로 주로 고민을 하는데 그러다보니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생각하게 되고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제는 조금씩 알아보는 분들이 생기면서 그분들과 만나면 음악에 관해 더욱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요즘 연말이라 많은 연주회로 더욱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1년의 연주회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많은 연주회를 하였고 많은 연주회를 다녔다. 우리나라에서 수 천 개의 크고 작은 연주들이 올려 졌을 것인데 과연 우리의 음악계가 건강하게 굴러가고 있는가?

얼마 전 후배의 귀국 독창회를 다녀왔다. 외국 유학에서 갓 귀국한 의욕에 찬 신인들이 국내 음악계에 도전장을 내미는 무대였다. 때론 놀라울 만큼의 실력을 가진 신예들이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가끔은 답답한 기분이 든다. 가족과 친지들로만 이루어진 청중, 똑같은 레퍼토리, 똑같은 해석, 똑같은 프로필 등 등. 오늘날 클래식 음악 시장은 붕괴되었고, 상업주의 음악이 행세를 하는 문화 자본주의 시대에 클래식 청중이 없다고 한다.

한쪽에선 서양 음악이 이 땅에 들어 온지 100년이 되어가도록 아직 우리의 음악이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음악의 사대주의를 자성하는 소리가 높다. 음악적 완성을 향한 절대 음악의 정신성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은 엄숙한 것이며 상업주의에 물들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음악의 귀족주의는 시대착오적이다.

과거 음악사에서 교회음악의 권위주의를 벗어나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위해 시장바닥에서 노래하던 자유로운 음유시인 ‘트루바도르’가 우리 음악가들의 선배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음악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음악인가, 본질적인 물음들은 괴로울 것이다. 뛰어난 연주자의 연주를 감상하며 깊이와 치열한 노력을 갖춘 음악을 듣고 있자니 앞으로 음악적 환경이 열악한 이 땅에서 활동하게 될 이 사람에게서 이처럼 훌륭한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반문이 인다.

음악은 사실 일반 청중에겐 음악의 자체 발생적 의미가 아니라, 관련 발생적 의미로서 다가올 때가 많다. 페달에 닿지 않는 짧은 다리를 흔들며 피아노를 치는 아이의 서투른 소나티네도 그런 의미에서 감동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 땅의 미래의 음악가들에게 자신들의 음악이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한다면 아주 작은 무대라도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음악가의 위치는 어디쯤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필자는 음악교육의 방법론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이 같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음악의 사회학적인 인식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음악을 통해 주변과 커뮤니케이션함으로써 음악의 영향력을 경험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교육 수단보다도 중요하며 강력한 배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며 이러한 경험을 통한 배움이 확대되고 축적 될 때, 우리 음악의 저변은 확대될 것이며 흔들림 없는 굳건한 문화의 기반이 될 것이다.

이제 음악가들이나 음악에 관심이 많은 분들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사회를 위한 역할을 찾아 나서야 할 시기에, 세계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를 키워내고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지역 커뮤니티를 위한 작은 음악회들의 역할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기자(중앙대 음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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