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종 시민기자(수필가)
어제는 그동안 별러 오던 처인구의 상징이기도 한 처인산성의 성지(城址)를 찾았다. 이 항몽(抗蒙)의 성지는 많은 학자, 문인들 그리고 여러 매스컴들이 앞다투어 알려왔고 요즘 들어 누군가가 <처인문학>을 발간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말도 들었다. 안 가본 명소이기에 찾아 갔으나 한마디로 실망에 아쉬움뿐이었다.

이 산성의 전체 둘레는 425미터이고 1970년에 성곽을 수리하여 높이가 남서쪽은 해발 10미터라고 하나 그 옆으로 논둑길 밭길이 이리저리 이어져 마치 어느 한적한 시골동네의 뒷동산 같았다. 여기가 국운이 걸린 전투가 벌어졌던 결전장이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흔히 우리는 산성이라면 높다란 성벽위에 문루(門樓)가 보이고 성벽마다 밖을 내다보는 망창(望窓)이 있으며 바로 그 밑으로는 해자(垓字)가 있는 것으로 지레 짐작 했으나 빗나갔다. 이런 곳에서 13세기 초 동북아시아의 평원을 누비며 세계정복의 야욕을 채우려던 몽골 장을 어떻게 화살 한 발로 사살했을까 믿어지지 않았다.

사다리꼴모양으로 된 밭보다는 조금 높은 4미터에서 6미터이나 이 등마루에는 7백년 넘는 세월 동안 몇 번 나무가 바뀌었는지 모를 키 큰 나무들이 이파리들을 모두 떨쳐 보낸 채 앙상하게 겨울바람을 맞고 있어 을씨년스러워 보이기조차 했다.

사기를 보면 “1231년 8월 1일(고려고종18) 제1차로 침공한 몽골은 이듬해 9월 제2차 침공하여 대장 살례탑(撒禮塔)이 남강(한강)을 건너 수주(수원)를 지나 중원(청주)으로 가는 도중 이곳 처인산성에 이르렀고(군창이던 이곳에 군수물자를 조달키 위하여 들렀다는 설도 있으나) 이때 40리 남쪽 진위(평택)에 있던 승장 김윤후는 12월 16일 이곳 처인산성에서 항전 중 화살 한 대로 적장을 사살하였다. 이 때 적장이 전사한 이곳 아곡리 마을 처인성 북쪽 들판을 사장대(死將垈)라고 부른다”고 적고 있다.

연전에 복원했다지만 그 흔적은 찾을 길 없고 1979년 12월 16일에 완성했다는, 좌측으로는 높이 10미터에 넓이가 15미터 됨직한 화강암 석재에 처인성승첩기념비가 서있고 글 밑에는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던 최영희씨가 글을 짓고 글씨는 원로 서예가 김기승씨가 썼다는 기록만 있을 뿐 건립관청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또한 오른쪽에는 4미터 됨직한 철판으로 경기도기념물 제 44호에 600여자의 안내문이 모두였다. 하긴 이 기념비는 제막식도 하지 않아서 왜 그랬는지 궁금하다는 후문도 있다. 국보(國寶)도 보물(寶物)도 문화재(文化財)도 사적지(史蹟地)로도 끼지 못한 낮은 급의 한낱 도의 기념물 제44호로서 등록되어 그런 대접을 했는지 모르겠다.

거듭 말하나 고증을 통해서라도 이 산성에서 김윤후 승장이 화살을 쏜 지점과 적장 살레탑이 화살을 맞았다는 지점을 알리는 표지(標識)가 없음도 역시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리의 3,4세들은 적장을 화살로 쏘아 죽인 현장이 바로 여기다 하는 것을 말보다는 눈으로 확인하기를 더 원할 것이다. 지난 2004년 8월 어느 날인가 용인시민신문에 실린 한 기사, 세중옛돌박물관 장원섭 전 학예연구실장이 기고한 글이 생각난다.

경기도박물관에서 평택관방유적 정밀지표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그 조사결과를 근거로 평택의 봉남리 산성이 처인성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주장을 하여 논쟁이 있었다는 “처인성 위치, 논쟁의 여지없다”는 글은 용인시민이면 너도 나도 꼭 읽어 둘 글이다.

더욱이 처인이란 두 글자를 머리위에 얹고 사는 30미만에 가까운 처인구민의 처인산성의 대접이 이토록 허술해서야 하겠느냐는 소리가 이 산성을 돌아내려오는 30분 동안 귓가에 크게 들려 왔기에 해보는 넋두리이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