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뭄을 덜어주는 비가 내리고 나더니 추위가 성큼 다가서서 서리가 내린 곳도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을 보면 계절은 그렇게 어김이 없다.

집에 있는 시간이면 늘 열어 두던 창은 이제 아침, 저녁으로 환기를 하거나 청소를 할 때에만 잠깐잠깐 열게 될 것이다.

1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주무시던 방 창문을 열고 닫다 보면 때로 그 창 너머로 하루 온종일 얼굴이 새카맣게 타도록 동네 구석구석을 걷고 걷다가 집으로 오고 계신 아버지의 작고 지친 모습이 보이는 듯 멈칫 다시 볼 때가 있다.

서느런 가슴을 가라앉히고 창밖을 내다보면 아버지만큼의 나이 드신 분이 조그맣게 걷고 계시고 그 뒤에서 느티나무, 산수유, 자작나무, 단풍나무들이 훨훨 잎들을 날리고 있다. 이미 떨어진 잎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바싹바싹 말라가고 더러 밟혀 부서지기도 하며 보는 이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한다.

벼가 베어진 논, 콩이랑 깨를 거둔 밭, 말라가고 있는 고추밭, 바람에 서걱대는 옥수수들, 더 잔잔해진 개울물소리.

씨를 익히느라 고개를 숙이고 섰던 해바라기들도 꺾여 없어졌고, 바람 따라 은빛의 물결처럼 반짝이던 미루나무도 잎이 다 떨어지고 온전히 나무줄기만 서있다.

첫 주에 입동이 있는 11월은 녹색연합에서 만든 열두 달의 우리 이름으로 미틈달이라고 한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낀 달이라는 뜻이다. 가을과 겨울 사이인 이때쯤 사람들은 곡식과 열매를 거둬 갈무리하고 풀들은 한겨울 추위를 견디기 위해 짙은 색으로 몸빛을 바꾸고 로제타 잎 모양으로 땅바닥에 바짝 붙는다.

또한 나무들은 나무들대로 잎을 다 떨어뜨려서, 동물들은 동물들대로 겨울잠을 잘 준비를 하면서 미틈달을 지낼 것이다. 얼마 전까지 그토록 화려하고 눈부신 생명의 빛으로 움직임으로 가득하던 산과 들판은 이제 점점 비어가지만 가만히 보면 여전한 생명의 몸짓이, 서리를 맞고 나면 더 짙어지는 국화처럼 그윽한 향기가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달력에서도 11월은 부족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느낌은 닮아있다. 크리크족은 물빛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체로키족은 산책하기 알맞은 달, 히다차족은 강물이 어는 달, 테와 푸에블로족은 만물을 거둬들이는 달, 위네바고족은 작은 곰의 달, 키오와족은 기러기 날아가는 달, 아라파호족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불렀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서 만물을 거둬들이고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물빛을 보며 산책을 하고 작은 곰이 고기를 잡는 강물은 얼어가고 기러기는 따뜻한 곳을 찾아 저 멀리 날아가지만 결코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닌 달, 한껏 기운 가을 그렇게 모퉁이를 돌면 곧 11월이다.

만물을 거둬들이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나뭇잎으로 검어진 개울물도, 어는 강물도, 작은 곰도, 날아가는 기러기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바뀌는 계절의 깊이를 제 삶에 제 몸에 그리는 달, 그래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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