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가 되고픈 ‘나의 노래 원정기’

“포곡에서 막 경로잔치를 마치고 왔어요.”
신두만(43·처인구 김량장동)씨는 무대의상을 갈아입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그에게 5월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신씨는 가정의 달을 맞아 용인지역 곳곳에서 열리는 행사 진행자로, 지역 방송 프로그램 녹화도 해야 하는데다 생애 첫 앨범을 내고 가수 활동도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5월은 뭔가 헛헛하다.
“행사가 많은 달은 바빠요. 특히 5월부터 12월까지요. 1~3월에는 백수인줄 알 정도니까요. 그런데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하죠.”


# ‘내사랑, 와우’로 1집 가수 돼

신씨는 용인에서 꽤 유명하다. 전국노래자랑에 ‘송해’가 있다면 용인에는 ‘신두만’이 있다. 티브로드 기남방송이 용인, 이천, 여주, 평택 지역을 찾아다니며 열고 있는 노래자랑 프로그램 사회자로 TV에 출연한지 어느 덧 10년째. 각종 행사 사회자로 얼굴을 알린 신씨의 꿈은 가수였다.

1985년, 갓 20살 청년이었던 신씨는 디스크 쟈키(DJ)로 활동했다. 그 당시 DJ하면 김기덕, 김광환씨가 최고로 꼽혔고 음악다방이 한창 유행했다. 가수를 하고 싶었던 신씨는 음악다방 DJ로 전전했지만 음악다방의 인기는 점점 시들해졌고 젊은 사람들이 나이트로 몰렸다. 그도 음악다방에서 86년도에 탤런트 백일섭씨가 운영하는 나이트클럽으로 옮겼다.

“DJ경기가 안 좋아서 다들 나이트로 직종을 옮길 때거든요. 그 때 백일섭씨가 키워준다고 했는데 하하. 그 때는 지금처럼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가수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일 좀 할 만하니까 군입대 영장이 나왔고 89년 2월 제대를 하던 해는 심야영업제한으로 밤업소 영업시간이 12시로 제한돼 일자리가 없었다. “지상파방송 외에는 갈 곳이 없었어요. 무명에게는 기회조차 사라진 것이죠.”

그렇게 그는 가수의 꿈을 잠시 접었다. 경호경비회사에 입사한 신씨는 8년9개월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용인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1994년. 신씨는 가수의 꿈을 다시 펼치게 된다.
“용인에 왔을 때 용인예총이 설립됐어요. 연예협회 창립 멤버로 활동했죠. 직장 다닐 때도 가수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노래자랑, 가요제에 나가서 상도 타고 상금도 받았거든요.”

연예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맡게 됐고 2007년도부터 ‘행복한 세상, 떳다 노래방’이라는 새 코너를 맡았다. “노래자랑 무대서면 노래하고 싶죠. 그런데 사회자가 노래를 하면 출연자들이 가려지잖아요. 저는 그들이 노래를 흥에 겨워 잘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역할이죠.”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신씨는 인터넷 음악카페 문을 두드렸다. “인터넷에서 노래를 하죠. 사람들은 소위 ‘삑사리’ 나는 것을 좋아해요. 편안하게 느끼면서 자신들의 의견을 얘기하고 신청곡도 올리죠. 인터넷이라는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것인데 아주 가깝게 있는 것 같아요. 또 다양한 장르를 라이브로 맘껏 부를 수 있어 좋죠.”

일단 ‘가수 신두만’의 이름은 인터넷을 통해 먼저 알려졌고 그는 2007년 7월25일 타이틀곡 ‘내사랑, 와우’로 정식앨범을 냈다. 누구나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정통 트로트는  아니지만 신나는 펑키 락이 흥겹다. 그리고 12월 말부터 인터넷 사이트 다음에 팬카페가 개설돼 만 명이 넘는 팬들이 그의 노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수원에 사는 한 부부가 운영하고 있어요. 저는 전혀 몰랐죠. 인터넷에서 이름 검색하다 알았는데 카페 부문 이슈 동영상 1위를 기록하기도 했어요. 얼굴은 잘 모르지만 정말 고맙죠.”

‘넷심’으로 탄력을 받은 신씨는 팬들이 원하는 노래는 다 부른다. 무대가 아닌 인터넷에서. 트로트, 정통 통기타 발라드 못 부르는 노래가 없다. “시간 날 때 혼자서  연습하면 잘 안되는데 듣는 사람 있으면 더 잘돼요. 지적도 많이 해주고요.”


# 신두만의 ‘행복송’은 가족의 힘

“자기돈 쓰고 돌아다니는데 지금도 집사람은 바가지를 긁죠.”
자신을 찾아주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서 고마운 신씨는 아내에게 늘 미안하기만 하다. 

“저의 첫 노래는 ‘아름다운 나의 용인’이란 곡이예요. 연예협회 공정배 지부장이 가사를 쓰고 곡을 붙였죠. 제 고향은 전북 남원이지만 아이들의 고향은 용인이거든요. 저는 이 노래가 좋고 지금도 불러요.”

“가수들이 초반에는 실패를 많이 해요. 현철이 22년 만에 셋방살이를 벗어났고 무조건을 부른 박상철도 수년간의 무명시절이 있었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는 왜 총각 때 가수를 하지 결혼해서 하느라 힘들게 하느냐고 투덜대기도 하는데…그 때는 참 미안하죠.”

20여 년 만에 가수의 꿈을 이룬 신씨는 그의 노래가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다.
“13살, 11살 된 두 아들과 8살 된 딸은 아빠가 TV에 나오면 좋아하죠. 가야금을 연주하는 딸은 저와 공연을 같이 다녀요. 노래가 많이 알려져야 되는데 시간이 없어요. 제가 몸담고 있고 저를 만들어준 방송국이 우선이니까요. 하루에 발매된 앨범이 수 백 장인 현실에서 정상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것이죠. 부산을 가도 대전은 반드시 지나야 하지 않습니까? 거쳐야 할 과정이 있는 것이죠. 제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길 바랄 뿐이죠. 어떤 노래든 자주 들으면 흥얼거리게 되니까요.”

‘당신 화난 모습 보며 내 마음이 아파요. 당신 눈에 눈물 고여 있을 때는 내 자신이 나빠요. 당신 사랑합니다 그대 영혼까지도. 이 목숨을 바쳐 당신만을 사랑해’… 가수 신두만 의 첫 앨범 ‘내사랑 와우’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그것이 곧 그의 삶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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