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계대탐사 삶터따라 사백리(20)

▲ 지산 CC→ 도창리 동맥이산 → 미륵산→ 말등대산→ 영동고속도로→ 양지 추계리 42번 국도
1년에 걸친 용인시계탐사 대장정이 종착점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다. 다음 한번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했던 그 지점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 무려 400리길을 걸은 것이다. 대원들의 심정은 벌써부터 착잡한 모양이다.

“1년 내내 첫째 주와 셋째 주 토요일은 아예 집안 행사조차도 일정을 잡지 않았어요. 허허.”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이거 끝나면 어떻게 해. 뭐 다른 거 좀 만들어 보면 안될까?”

나름대로 탐사단원으로 참여한 뜻은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끝날 즈음에 선 대원들은 한결같이 아쉬운 모양이다.

이번 탐사는 구간이 짧다. 양지면 지산골프장에서 출발해 평창리를 거쳐 추계리에 이르는 길이다. 용인의 동부권역에 해당한다. 밑으로 도창말이 보인다.

양지면과 원삼면의 경계를 이루는 좌찬 고갯마루에 위치한 마을이다. 양지면 평창리에 딸린 도창말은 예전부터 정부의 환곡미를 보관하던 창고와 무신난 때 군수물자를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정양화 용인향토문화연구소장에 따르면 도창말은 도장골과 같은 뜻을 가진 땅이름이라는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도장골에서 ‘도장’이라는 말은 안방을 가리키는 옛말로서 안방처럼 아늑하게 생긴 지형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역사의 현장 도창말을 지나며

도창말은 지리적인 위치와 역사의 한 장면에서도 빠질 수 없는 마을이기도 하다. 용인에서 ‘하늘아래 첫 동네’하면 양지면 정수리가 떠오른다. 그에 못지않은 마을이 바로 도창말이다. 영남대로의 구간별 지형을 살펴볼 때 문경새재는 영남대로 중간에 위치한 최대의 장벽이었다. 그 다음은 음성에 있는 임오치였다.

임오치를 넘으면 서울로 향하는 가장 높은 고개가 바로 좌전고개(좌찬현)이다. 그런 이유로 좌전고개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고 인근의 행군이 산성, 건지산 봉수대 등 숱한 군사유적과 유물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용인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벌어진 곳이 바로 좌전고개였다. 도창말 앞 대로변에 있던 한 주막에서 만세운동 지도자들이 모의를 하는 한편 지휘본부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창말 원로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대원들은 도창리 평촌 마을 앞에 있는 형제봉을 넘어 동맥이산을 거친다. 용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다지 넓지 않은 골을 끼고 제법 너른 들판이 동서로 형성되어 있다. 같은 방향으로 42번 국도가 흐른다. 가만히 보면 거의 비슷한 축으로 둔덕길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수여선 철로길이다. 수원-여주간을 잇던 협궤 철도노선인 수여선. 그 시작은 1930년 12월 이었다.

수여선 협궤열차의 흔적과 추억

민간회사인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여주 지역의 쌀을 수송할 목적으로 부설한 수여선은 광복 후 국유화 정책에 따라 교통부 철도국 소유로 변경되기도 했다. 협궤 철도노선은 과거 수인선과 수여선 만이 있었는데, 도로와 자동차 등 육상교통의 발달에 따른 수익성 악화와 영동고속도로 개통 이후 수요 급감에 따라 1972년 3월 31일자로 전 구간이 폐선되고 말았다. 양지를 거쳐 제일리에도 간이역이 있었는데, 이 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은 역이기도 했다.

어느덧 금박산이 바라다 보이는 추계리에 이르러, 대원들은 차가 씽씽 달리는 영동고속도로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하산해야만 했다. 도로 개설과 골프장 건설 등으로 많은 산줄기가 끊겨 나가고 있음을 우리 대원들은 그간 탐사를 통해서도 숱하게 확인해 왔던 터였다. 자연과 생태계 보존, 그리고 인간의 편의 사이에서의 끝없는 갈등은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용인시 경계를 1년간 돌며 느꼈던 지나친 개발의 현장들은 우리가 무엇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지를 충분히 느끼게 해주고도 남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걷던 걸음은 어느새 가벼워졌다. 맛있는 점심과 정월 대보름맞이 윷놀이 행사가 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용인시계대탐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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