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계대탐사 삶터따라 사백리 (11)

용인시민신문 - 용인시산악연맹 - 용인의제21 공동기획

험로로 이어진 고려 백자 마을 상반곡에서 석고개까지
9km 332고지→ 294고지→ 삼봉고개→ 236고지→ 화성산→ 석고개

오랜만에 청명한 가을빛깔을 보는 듯 싶다. 이어진 궂은 날씨에 탐사를 한 차례 걸렀던지라 대원들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인다. 11차 탐사의 시작지점은 처인구 이동면 서리 상반곡이다.

요즘은 도로 사정이 좋아 느낌이 덜 하지만 꽤나 깊이 들어앉아 있는 마을이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일부 대원들이 탄성을 토해낸다. 일렬로 늘어선 나무들을 보고 눈을 떼지 못한 것이다.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마을 숲을 본 것이다.

얼추 200여 미터에 걸쳐 있는 마을 숲은 아름드리 느티나무 등으로 들어 차 있다. 마치 집으로 치자면 대문이다. 옛 조상들은 이처럼 인위적으로 적당히 폐쇄된 공간을 만들어 썰렁하고 허전함을 채웠다. 더불어 마을 안의 재복은 밖으로 무작정 흘러나가지 않도록 하면서 바깥의 재액은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풍수상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날의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풍치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니 좋기만 하다.

서리 상반곡을 지나면서 또 한 가지를 빼 놓을 수가 없다. 시 경계 탐사를 위주로 하다 보니 시간 상 답사를 하지 못했지만 향토유적 제45호로 지정된‘서리 2호 가마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리상반 고려 백자요지’는 고려시대 초기인 11세기의 것이다. 보존상태도 상당히 양호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보니 상반곡은 용인시는 물론 관련 학계로부터 이래저래 깊은 관심을 받는 마을이 되어 있다.

▲ 출발에 앞서 기념사진

용인시계 대탐사단은 이처럼 유서 깊은 마을 서리 상반곡에서 수 백 년 묶은 마을 숲을 비켜 산으로 올랐다. 서쪽으로 화성시 동탄면을 경계로 걷는 산행은 도무지 없는 길을 만들며 나아가다 보니 걸음을 멈추거나 다시 되돌아 길을 찾기가 일쑤다. 산행팀을 맡은 황영용 팀장 일행이 꼼꼼히 사전답사를 했지만 그조차 진땀을 흘리고 만다.

혹여 초반부터 힘이 빠질세라 황신철 단장은 우수갯 소리를 섞어가며 대원들을 격려하고 안심시킨다. 오늘 목표는 9km. 날씨 관계와 혹서기 휴식으로 당초 목표 일정보다 다소 늦은 편이어서 최대한 멀리까지 진출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틈틈이 듣던 양춘모 식생팀장의 재미있는 생태계 해설도, 문화역사팀의 향토에 얽힌 이야기도 줄어들었다.

▲ 이동면 서리에서 남사면 완장리로 향하는 탐사대원들

산길을 걸으며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은 시원한 가을 바람이 씻어주니 기분만큼은 상쾌하다. 간간히 울창한 숲 밖으로 보이는 누런 들판은 어느덧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임을 확인해 준다. 얼마를 왔을까. 일행은 삼봉고개를 넘어 왼편 함봉산을 바라보며 남사면에 접어든다. 완장리가 첫 마을이다. ‘완반지지(完盤之地)’라 하여 천혜의 피난지로 정감록에도 소개됐다는 설이 있는 이곳은 함봉산을 중심으로 양 날개를 펼친 듯한 낮은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혹시 이곳이 고려 처인토성의 흔적?

특이한 점은 시계를 따라 난 길은 없어도 남사에서 오산으로 가로지르는 소롯길이 적지않게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요즘이야 등산말고 산길을 걷는 이들이 거의 없을텐데도 잘 다져진 채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용빈도가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는 길이다. 고갯마루에는 어김없이 돌무더기를 쌓아 산행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한 흔적도 빠질 수 없다.

▲ 정상에서 동탄을 바라본 모습.

완장리 출신으로 매번 탐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김지홍 전 시의원의 설명처럼 이는 과거 생활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행정구역은 용인에 속하지만 예전엔 시내 중심지로 통하는 변변한 길조차 없었다. 학교 진학이나 소비품 구입 등 생활권은 오히려 오산권에 속했다. 그렇다보니 오산을 중심으로 평택 또는 수원으로 직접 통하는 산길은 매우 발달했던 것이다.

완장리와 북리 그 경계지점 즈음에 왔을까. 숲 속에 앉아 맛있는 식사를 하고 걷자니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대개 시계 길은 산 마루를 경계로 하기 때문에 험하고 좌우를 다 보면서 걷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왠지 발밑이 인공적으로 조성된 길처럼 유난히 높족하고 편안하다.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던진다. “이거 성 길을 걷는 것 같애”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도를 놓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아곡리 골짜기에서 뻗어 온 지점이다. 바로 아곡리에는 그 유명한 처인토성이 있어 용인을 대표하는 관방유적지이자 역사적 흔적이 서린 곳이다.

그렇잖아도 처인성터가 그 위치나 규모로 보아 과연 대몽골 제국의 기마군단을 물리친 승첩지였을까 하는 의문은 학계에서 조차 많았다. 다행히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시대의 병기를 다수 출토함으로써 의문이 확실히 해소되긴 했다. 다만 그 규모에 관해서만은 여전히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혹시 그렇다면…”

▲ 처인성지에서

역사적 상상력과 추론은 때때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북리와 통삼리를 경계짓는 석고개를 끝으로 일정을 마치고 탐사단 일행은 처인성으로 향했다. 그리 넓지 않은 처인성터를 확인한 대원들은 아마도 머릿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까 거기까지 성터 아냐?”시계 탐사는 종종 새로운 호기심과 일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다시 한 번 밟을 수밖에 없게 됐다.

/ 시계탐사단 공동집필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