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역사인물 발굴

3대 독립운동가문의 딸…

매년 경기도는 ‘여성인물 재조명 사업’을 벌이고 있다. 역사 발굴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뤘던 여성인물을 찾아 오늘에 귀감을 삼고자 함이다. 마침 올해는 용인출신으로 ‘용인 3대 독립운동 가문’의 일원인 오희영 선생이 집중 조명된다.

13일, 용인문화예술원에서 열리는 「한국 여성 광복군 오희영 재조명 심포지엄」은 경기도 가족여성정책국에서 주최하고 강남대 경기문화연구소(소장 홍순석교수)와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유성희)가 주관한다. 의병장 오인수와 독립운동가 오광선 장군, 그의 자녀 오희영 · 희옥과 사위 신송식으로 이어지는 ‘3대 독립운동가문’은 용인의 자랑이면서 이미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광복군 오희영에 대한 집중 조명은 그간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 기회를 빌어 향토사 발굴 차원에서 오희영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사를 다시 짚어보는 기회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내용은 심포지엄 발표문을 요약해 엮는다. 편집자.

▲ 오희영 : 두번째 줄 왼쪽에서 3번째 인물

항일 앞장 만주·중경서 활약

오희영의 광복군 활동

오희영(1924~1969)은 광복군 출신으로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가 고향인 오광선 장군과 어머니 정정산 여사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래로 임시정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함께 활동한 여동생 오희옥과 남동생 오영걸이 있다.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만주와 중국관내를 전전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동안 다른 독립운동가 집안과 같이 가장이 없는 오희영의 집안은 어머니 정정산이 꾸려나갔다. 화전을 일구어 옥수수와 조를 심고, 때로는 중국 사람들에게 품삯을 받아 자녀들을 키웠다. 그뿐만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독립군의 밥을 해 대고, 농사를 지어 군자금까지 마련해야 하는 억척스러운 일을 혼자서 꿋꿋하게 해냈다고 한다.

오희영이 태어난 곳은 길림성 액목현으로 이곳은 오광선이 활동하고 있던 서로군정서 본부가 1920년 일제 토벌군을 피해 이동한 이래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한 곳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두 살 아래인 여동생 오희옥도 액목현에서 태어났다. 남동생 영걸은 후일 중국 남경에서 태어났다.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진강과 남경을 떠나 여러곳을 전전하다가 중경에 정착했다. 여기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청년공작대로 약칭)가 조직됐다. 청년공작대는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는 세력인 광복진선 계열의 청년들에 의해 만들어진 군사조직이다. 이들은 또한 임정의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구성원들이기도 하다. 오희영과 그의 동생 오희옥은 여기에 참여했다.

동생과 함께 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이때 오희영은 15~16세, 여동생 오희옥은 13~14의 어린 나이였다. 청년공작대는 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방법은 벽보·합창·연극 등을 통해서 중국인들의 반일감정과 항일의지를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오희옥의 증언에 의하면 유년부도 함께 설치되어 가두선전·무용·노래 등을 했으며, 자신도 무대에 올라가 무용도 하고 러시아 춤도 추어 중국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있다. 청년공작대의 이러한 선전활동은 그해 4월 이들이 유주를 떠나 기강으로 가게 되면서 두 달 동안 짧은 활동기간이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총사령부성립 전례식을 갖고 성립되었다. 오희영은 중경에서 중경시립 중학교에 다니다 입대하였다고 한다. 그는 1942년 4월 징모처제6분처라는 명칭아래 안휘성 부양으로 떠났다. 지대장 김학규와 함께 현지로 떠난 간부로는 후일 남편인 신송식(진경성)도 함께했다. 이들은 현지에서 초모활동과 선전활동을 전개하면서 자력으로 병력을 확보하여 이를 기반으로 지대라는 단위부대로 발전해나가야 했다.

오희영을 비롯한 징모제6분처도 안휘성 부양에 근거를 두고 대적 각종 공작을 전개하였다. 주요 도시에 공작 거점을 구축한 징모제6분처는 전방 각종 공작활동을 본격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선전활동은 대개 광복군의 창설 사실과 그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이며, 또한 광복군의 활동상을 대내외에 알리고 동시에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기 위한 다각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들의 선전 대상은 주로 적 점령 지역내에 있는 동포들에게 집중되었다. 1940년대 만주지역에는 2백만 명이 넘는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관내 지역에도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일본군의 군속으로 근무하는 한인의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을 대상으로 광복군의 참여와 지원을 위해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해방 앞두고 김구주석 비서실서 일해

일본군내에 있는 한적사병들도 선전활동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이들이 선전활동의 주요 대상이 되었던 것은 1938년 이래 지원병제가 실시되고, 1944년에는 학병과 징병들이 징집되면서 일본군내에 한인사병의 수가 급증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또 하나는 대적선전이다. 이는 적군의 사기저하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중국전선에 나와 있는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였다. 일본군벌의 만행을 폭로하고 일본의 패전을 강조했는데, 이를 위해 한국어·중국어·일어·영어 등으로 된 잡지 발간과 전단·벽보 등을 작성하여 유포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오희영이 징모제6분처에서 활약하고 있던 중 한광반 졸업생 가운데 36명은 중경에 있는 총사령부로 갈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신송식이 인솔대장이 되고 오희영을 포함한 일부 기간요원을 포함, 모두 53명이 1945년 1월 31일 중경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비롯한 총사령부와 임정의 경위대, 그리고 서안의 제2지대로 각각 배속되었다.

오희영은 중경 임시정부 주석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하면서 1944년 임정요인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던 토교에서 한필동 목사의 주례로 신송식과 혼인식을 올렸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선전활동을 하던 오희영 자매와 그 가족은 해방을 맞아 다른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중경에서 배를 타고 양자강을 내려와 남경에서 기차로 갈아타고 상해로 간 후 상해에서 귀국선을 타고 부산을 경유 인천에 도착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김병기(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

용인의 3대 독립운동 가문이란?

용인에서 태어나 3대에 걸친 빛나는 항일투쟁 업적을 남긴 이들이 있었다. 구한말 경기 일원에서 의병투쟁에 앞장섰던 의병장 오인수가 그 1대요, 만주를 주무대로 해외 항일운동과 건국과정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오광선 장군이 그 2대다. 또 중국에서 태어나 아버지에 이어 항일운동을 했던 오희영, 오희옥 자매와 큰 사위가 3대다.
□ 1대 오인수 의병장(1867∼1935)
□ 2대 오광선 장군(1896∼1967)
□ 3대 오희영·오희옥 자매

내 기억속의 언니 오희영

명랑하고 쾌활 중3때 광복군에

아버지 찾으러 최전방 자원

언니는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또 말도 청산유수로 잘하고 남자처럼 활달한 성격이었다. 언니는 중학교 3학년 까지 중경의 공립중학교에서 3년 정도 공부하다가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3지대가 있는 안휘성의 부양(阜陽)으로 갔다. 언니의 생각은 일본어를 배워 적 후방인 만주로 들어가 아버지를 찾아서 모시고 나오겠다고 최전방으로 자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언니는 결국 만주로 가지 못했지만 1944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고 김학규가 지대장인 제3지대에서 지복영, 오광심과 함께 여성대원으로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다. 형부 신송식은 제3지대 교관으로 있다가 언니를 만났고 거기서 연애가 돼서 결혼하게 되었다. 언니하고 형부는 김구주석 비서실에서 일하다가 다른 사람의 주선에 의해 예배당이 있던 토교에서 혼인식을 하게 되었는데 주례는 한필동 목사가 했다. 형부는 그때 중국군 소령 계급으로 김구 주석 경호 대장이었고 언니는 선전활동을 담당하였다. 어머니 정정순은 1940년 창설된 한국혁명여성동맹에 가입하여 정정화, 오광심, 오영선등과 함께 활동했다. 어머니는 해방 직전 나와 함께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한국독립당은 18세 이상이면 가입이 가능하여 나도 당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된 후에는 바로 귀국을 하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해방 다음해 가서야 임시정부가 주선하여 중경에서 배를 타고 남경으로 가게 되었다. 남경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상해로 가서 항구에서 일본 수송선을 얻어 1946년 1월 국내로 들어오는 배를 탔다. 이 배에서 광복군하던 사람과 가족들을 다 만날 수 있었다. 1946년 6월에서야 우리는 부산에 도착했다가 다시 인천에 발을 내릴 수 있었다. 이때 아버지가 인천에 마중을 나오셔서 10년 만에 상봉을 했다.

귀국을 하고 난후에는 다들 생활력이 없어서 우리식구의 생활은 그냥 어려웠다. 우리 아버지는 시골 어디서 누군가 쌀을 줘서 그걸로 우리 식구가 먹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그때 종로4가 원남동 적산집에 살았다. 아버지는 우리와 같이 있다가 한미호텔의 광복군 국내지대를 만들어 거기서 주로 계셨다.

우리 집에는 형부가 귀국, 같이 살게 되어 식구들이 다 있었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으니까 생활이 어려웠다. 그때 어머니는 비공식적으로 담배를 얻어 지하실에서 몰래 말아 팔아서 그럭저럭 죽도 끓여먹고 하루하루를 지냈다.

가난과 암 6번째 조카낳은 후 운명

나는 육군 피복창 직원시험에 합격하여 경리과에 채용되어 근무하다가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서울에 있던 나는 비록 공산군 수중에 떨어졌지만 언니와 함께 언니 애들을 업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용인 원삼면 죽릉리 옛날 우리식구가 만주로 떠나기 전에 살던 동네로 갔다. 거기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먼저 내려가 계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국군이라 이 사실이 언제 발각될지 몰라 불안한 마음으로 9.28 서울 수복 때까지 보냈다. 용인에서 머무를 때 언니는 용인 김량장에서 미군비행기에서 쏜 기관총에 다리를 맞아 피를 많이 흘렸는데 급히 어머니가 옷을 찢어 댕겨 매서 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약이 없어 옥도정기나 마이신 정도만 발라 주는 정도였다. 6.25 전쟁이 와중에 언니는 5살짜리 큰애와 3살짜리 둘째 이렇게 아들 둘을 병으로 잃게 되었다.

아버지는 대령으로만 8년간 있었지만 장군으로 진급하려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허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49년 김구선생이 암살되셨을 때 처음으로 조문하러 가셨는데 경찰이 아버지 이름에 빨간 도장을 찍어놓을 정도였다.

한국에서 형부 신송식 역시 임정계열인데다가 이범석씨와 생각이 달라서 군대에 가지 않았다. 거기다가 나중에 국내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여 손해를 크게 봐서 식구들은 어렵게 살았다. 언니는 돈이 없어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지 못해 결국 6째 조카를 출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부 역시 언니가 죽고 몇 년 후에 예전부터 워낙 담배를 심하게 피워서 폐암으로 역시 세상을 떠났다. 언니의 애들 6남매는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렵게 살았다.

오희옥(독립유공자, 오희영 여사 동생)의
구술을 김태근(태성고등학교 교사)이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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