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터따라 사백리 9

# 환경유해 식물에 점령당한 청명산

두 차례의 긴 휴식(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에 시계탐사를 하기 때문에 한달 정도)을 마친 시계탐사 대원들은 지난 18일 하반기 첫 시계탐사를 시작했다.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시작한 9차 탐사는 후텁지근한 날씨로 대원들의 발길을 무겁게 했다. 흥덕택지지구개발로 인한 공사차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덕동 일부 구간을 차량으로 이동한 잔다리마을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고개에 다시 탐사는 이어졌다.

13-14년 전만 해도 기흥읍 영덕리로 용인 땅이었던 수원시 영통동 황골마을 한국아파트 뒤 시경계를 따라 산행이 시작됐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10여분 걸으니 기흥구 영덕동과 수원시 영통동을 잇는 관자고개가 나왔다. 이날 청명산 산행은 관자고개에서 시작됐다. 청명산 등산로 입구 안내 표지판에는 청명산과 관자고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 “기흥구 하갈동과 영덕동, 수원시 영통동에 접해 있는 나지막한 산으로 덕암산과 돌고개를 통해 이어진 산이다.” 과거 기흥 하갈리에서 황골로 넘던 선비들이 의관을 벗어 놓고 쉬던 고개란 뜻으로 관자고개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청명산은 능선이 완만해 산책 나온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지만 광교산과 달리 등산로나 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은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았다. 청명산 정상에 다다른 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황영용 산행팀장의 산행시 주의사항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산행을 할 때에는 반드시 긴팔과 긴바지를 입어야 합니다. 덥다고 반팔이나 반바지를 입을 경우 땀 때문에 산모기의 공격을 받게 되고, 장시간 햇빛에 노출되면 자외선으로 피부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더욱이 산을 오르다 보면 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옷을 입을 때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같은 주의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는데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청명산을 내려올 때까지 산모기에 물린 것은 물론 탐사를 모두 마친 뒤 샤워를 히면서 팔과 목이 따끔거려 애를 먹었다. 황 팀장의 간단한 설명 뒤 양춘모 식생팀장의 청명산 식생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8차까지는 숲이 잘 조성된 곳을 지나왔고, 오늘은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리는 청명산에 왔습니다. 청명산에 오르다보니 돼지풀과 등골나무를 쉽게 접할 수 있더군요. 단풍잎과 비슷하게 생긴 돼지풀은 환경유해식물 1호입니다. 뿌리가 하나씩 끊어져도 거기에서 새싹이 나올 정도로 번식력이 강해 토종식물을 죽이는데 앞장선 대표적인 식물이예요. 또 꽃이 피면 송화가루날리듯이 꽃가루가 날려 포자가 산을 점령하게 됩니다. 싸리나무와 함께 인간이나 자연이 건드리면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게 이 돼지풀입니다.
외래식물은 왜 그리도 많고, 번식력은 어쩌면 그렇게 강한지. 머지않아 초강력 외래식물인 돼지풀과 등골나무가 청명산을 점령해버릴 것이란 섬뜩한 얘기는 재미나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반가움에 앞선 두려움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영통 편입에 대한 아픈 기억

시계는 청명산을 따라 계속 내려가야 하지만 길이 없어 노블카운티 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시계는 315번 지방도를 따라 수원과 용인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일행은 서농동사무소 앞을 지나 내서천으로 불리는 안서그네를 향해 비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지방도에서 벗어나 마을 안길로 들어서자 이내 서천동의 두 가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70년대 흔히 보았던 슬레이트지붕에 철제 담으로 둘러쳐진 낡은 집과 그 앞에 우뚝 솟아 있는 고층 아파트. 물론 아직도 수지와 구성, 기흥에는 한 공간에 두 모습을 보기 어렵지 않지만 서천동에 대한 감정은 또 달랐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서천동(당시 서천리)은 학생들이 자취나 하숙을 위한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대학이 있었지만 용인의 변방지역다보니 기반시설은 낡고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크고 작은 범죄에 노출돼 있었다. 이로 인한 주민들의 불만이 컸음은 물론이다.

이런 서천동이 택지개발지구로 묶이면서 아파트촌으로 변할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구간 역시 동탄신도시 공사로 시계를 따라 걷기 어려워 일행은 안서그네(내서천) 마을을 따라 걸었다. 바깥서그네와 안서그네, 불당골 모두 서천택지지구에 포함돼 곳곳에는 문화재 발굴조사에 따른 경작 등을 금지한다는 것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였다. 안서그네를 지날 무렵 문화재 발굴작업을 하는 한 분이 일행에게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냐”고 묻기에 “용인시계를 탐사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하면 뭐합니까? 개발이 되면 수원에 편입될텐데…”라고 말했다.

탐사단이 삼성전자로 유명한 농서동에 들어서기 전 반월에서 휴식을 취할 때 전해 준 정양화 역사문화팀장의 설명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 인부가 서천택지지구가 수원시에 편입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서글프지만 어쩌면 당연할 지 모른다. 그는 왜 서천택지지구가 수원으로 편입될 거라 생각했을까. 이쯤에서 청명산과 영덕동이 맞닿아 있는 영통이 어떻게 수원에 편입됐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수원시는 영덕동 영통지구가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자 생활여건 변경 등을 이유로 경기도에 행정구역 조정을 건의, 이를 받아들인 도는 1994년 용인군에 행정구역 경계조정업무 추진지침을 내려 보냈다. 비록 부결되긴 했지만 용인군은 이에 따라 지방자치단체구역변경안을 용인군의회에 상정했다. 당시 용인군의회는 1991년부터 선거가 실시됐지만 용인군은 상급기관에서 지명하는 관선군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용인군은 도시계획을 수립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과거 수지면 이의동이 그랬듯이 수원시가 영통지구를 수원시도시계획에 편입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택지개발에 사라져가는 문화유산

문화재발굴 작업을 벌이던 이가 ‘시계탐사 취지야 좋지만 헛고생하는 것 아니냐’는 뜻으로 말한 까닭도 영통지구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영통 편입의 씁쓸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용인시가 정체성 찾기에 얼마나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길 바람도 가져본다. 대표적인 예가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시인 노작 홍사용에 대한 무관심이다.

홍사용(1900-1947)이 누군가. 정양화 소장에 따르면 홍사용은 1900년 기흥읍 농서동 용수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2년 나도향, 현진건 등과 동인지 <백조>를 창간,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향토적이며 감상적인 서정시를 발표한 시인이 노작이다. 생가 중 안채가 농서동에, 묘소는 화성시 동탄면에 있으며 화성시와 후손의 후원으로 2002년 노작문학상이 제정됐다.

화성시가 노작문학상을 제정하며 선양사업을 벌일 때 용인시는 시민단체 등의 홍사용 생가 보존 필요성 제기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적 가치가 있어도 지정문화재가 아니라 지원할 근거가 없다”거나 <노작 홍사용 생가 보존 및 복원 문제>를 위해 향토유적보호위원회를 열었지만 문화재 가치가 떨어진다며 부결했다. 문학사적 가치가 큰 생가를 복원하려는 노력은커녕 아예 폐허로 방치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 팀장은 “용인출신이라는 것 뿐 표석하나 세우지 못하고, 곧 생가에 대한 흔적도 개발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서천동은 고종황제를 보위한 강석호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서그내에 그가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기 때문인데, 흔히 강석호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환관으로 꼽고 있다. 환관 가운데 최고의 지위인 상선에 올랐고,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가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할 때 막후에서 역할을 했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삼배울마을에 묘가 있다. 환관으로 있으면서 상당한 치부를 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송전초와 구성초 등에 그의 공적비가 있을 만큼 용인과 당시 주민들에게 기부를 많이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서천동에 나고 자란 노인들의 그에 대한 존경은 크다.

하지만 그같은 역사의 흔적은 머지않아 택지개발과 함께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용인시 경계에서는 우리의 옛 흔적과 역사, 사람이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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