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전파의 역사에서 용인을 빼놓고 말하긴 어렵다. 1885년 언더우드 목사 등에 의해 정식으로 이 나라에서 선교사업이 시작된 이래, 1894년 백암면 백봉교회가 세워지고 다음해에는 남사면 아리실 교회가 문을 열었다. 100년이 훨씬 넘어선 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 순교정신이 살아있는 곳도 용인이다.

어디 그 뿐인가. 대한성공회 선교교회로 출발한 용인교회(당시 샘골교회)가 발을 내 딛은 것이 1908년이니, 올해가 바로 「대한성공회」가 용인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10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 교회 매입 당시를 확인해주는 문서와 도면.
1908년 선교교회로 첫 출발

지난 12일, 700여평 되는 너른 마당과 아담한 전통 한옥식 건물로 이뤄진 처인구 이동면 천리 대한성공회 용인교회가 모처럼 왁자했다. 한 쪽에선 파전을 부치고, 다른 쪽에선 가져온 물품을 내려놓고, 남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이며 옷가지를 둘러보는 이들이 제법 붐볐다. 지역 독거노인돕기 바자회가 열린 것이다.

교회설립 100주년맞이 기획의 하나로 진행된 이날 행사의 성격과 모습은 100년 전 대한 성공회 수원교회의 선교교회로 시작되던 때의 접근 방식과 맞닿아 있다. ‘경술국치’로 역사에 기록된 1910년을 이태 앞둔 해, 경기남부지역 선교본부에서 용인 천리를 선교 거점으로 택했다.

그에 관한 자료가 없어 왜 천리로 오게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몇가지로 추정해 볼 뿐이다. 그 첫째는 한국에 파견된 2대 주교인 터너(단아덕)가 부임해 전도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거점으로 삼은 수원과의 연관성이다.

1905년에 성직자를 전임하도록 해 1908년에 완공한 새 수원성당(성스테반성당)은 당시로선 규모가 컸으며, 재원마련도 영국에서 대부분 지원한 드문 사례였다. 성공회는 수원개척을 기점으로 해 경기남부 곳곳에 새 회당을 마련해 나갔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1908년에는 샘골교회, 1909년 5월29일 공세리에 성빌립보성당 신축이다.

▲ ① 1909년에 찍은 성공회 천리(용인)교회 모습. 전통 한옥 건물에 십자가 모습이 이채로운 가운데 당시 한천서원의 영향으로 유지되던 것으로 알려진 ‘ㄷ자형’건물이 왼편으로 보인다.(출처: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100년) ③ 최근 교회 사진.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갖가지 기념행사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서당열어 교육선교 실천

특히 샘골은 성공회 초창기 선교 방식이 의료와 교육을 매개로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91년,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중 하나인 성누가병원(별칭 약대인 병원)이 성공회 의료선교의 효시가 되고, 다음 해 제물포에 야간영어학교를 개설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용인군 상동면 천동’에는 도암 이재 선생의 신위를 배향하고 후학들이 공부에 열중했던 한천서원과 관련된 흔적이 있었다. 한천서원은 대원군의 섭정때인 1865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진 많은 서원 가운데 하나가 됐음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그 후 노루실에 있던 한천서원을 중심으로 이재 선생의 학문적 후광에 힘입어 형성된 사족들은 천동(천리)으로까지 거주지를 확대해 나갔고, 현재의 성공회 자리에 강당을 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왔다. 이 같은 공간의 역사성을 살린 것이 바로 성공회 용인교회 였던 셈이다.

예로부터 ‘서원터’또는 ‘이문 안자리’로 불렸던 이곳을 매입해 서당을 통한 교육선교 장소로 이용한 것이다. 이는 당시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1910년 천리교회에 보관중인 보고서 자료에서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본면(상동면) 천동 소재 건물 76평과 공대 650평을 대영국 성교회 주교 단아덕의 소유가 적확하기로 자에 보고한다. 명치 43년 용인군 상동면장, 천동 이장, 용인군수 각하. 명치 43년 ”

또한 가옥매매 계약서도 있는데, 그 내용은 “매도인 이수용, 매수인 단아덕, 보증인 박수근· 천리동장 이호권·상동면장 신정균, 강희 4년”으로 돼 있다. 초창기 교회 건물의 형태가 ‘ㄷ자형’과 전통식 한옥 건물 2동으로 구성돼 있는 당시 사진을 통해서도 큰 규모를 갖춘 교육기관이자 선교기관인 성공회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40여년간 신도가 이끌어

이처럼 성공회 천리교회가 해당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에서도 처음으로 생긴 교회로서 100여호에 달했던 마을을 새롭게 눈뜨게 하였던 점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특히 서당의 설립이 문맹퇴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 이신우(어거스틴) 신부
그러나 초창기 의욕적인 출발과는 달리 성공회의 본거지인 영국의 지원 중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1937년 10월 31일 축복식을 가진 720평의 현 교회터는 당시 교구의 지원으로 구입하여 적지않은 역할을 하였지만, 수원교회의 선교교회인 천리교회는 상주하는 성직자가 없어 열성어린 신도회장 중심의 평신도가 교회 운영을 해야 했다. 

특히 1940년 이후 1980년까지 40여년간을 박안토니오(수덕) 신도가 회장을 맡아왔고, 그 이후 1992년까지도 이베드로(남산) 신자회장이 천리교회의 명맥을 이어왔다.

마침내 1992년 6월 수원교회의 배려로 성직자가 처음으로 상주하게 되고 그 첫 부임자는 박성순(야고보) 신부였다. 2000년에는 사제관이 건립되고 현재는 이선우(어거스틴) 신부가 부임해 활기찬 선교활동을 넓혀가는 동시에 내년에 있을 용인성공회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갖가지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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