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보다 더 용인사람이 된 황새울 관광농원 황금주 대표

왠지 순박하고 수줍어하는 듯한 표정, 차분한 말투 그리고 검게 그을린 얼굴. 그는 그저 평범한 시골사람이다.

그러나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신이 살고 있는 백암 일대의 향토사는 물론 용인에 대한 폭 넒은 지식에 기자가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 되고 만다.
먼 동네 체육 행사장에서도 마주치게 되는 걸 보면 그는 마당발임에 틀림없다. 그의 딸 이름이 ‘새울’. 마을 이름인 ‘황새울’과 같도록 지은 걸 보면 누구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토박이보다 더 용인사람 같은 사람. 그가 바로 황새울 관광농원을 운영하는 황금주(56)씨다.

# 건설회사 관리자에서 농사꾼으로

황씨가 용인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84년. 대그룹 건설회사 과장으로 있던 그가 용인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잘 나가던 때 이긴 하나, 용인을 둘러 본 그는 용인을 평생 살 곳으로 자리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화도가 고향인 그였지만, 이사를 자주 다녀야 했던 자신의 경험으로 그 소중함을 알고 있었고, 자식들한테 진짜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마침 중동해외 건설현장을 누비며 모은 종자돈이 좀 있었다.

이곳저곳을 물색해 그 중 백암면 황새울에 5만평에 달하는 땅을 어렵사리 사들였다. 당시 정부는 농촌 농업소득원을 다각화한다는 목표를 앞세워 특수작물이나 축산을 권장하던 때였다. 농토를 놀리고 싶지가 않았던 황씨도 ‘황주 농산’이란 간판을 내걸고 꿩 사육에 도전했다. 정부가 권장하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농업정책의 문제가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전국에서 너도나도 꿩 사육이 늘어나면서 과잉생산에 따른 판로가 막혀 버린 것이다. 이는 가격하락으로 이어졌다.

당시 종자 분양까지 하고 있던 황주농원은 더 이상 분양을 중단해야 했다. 이 때만해도 직장일과 농사일을 겸업했던 그는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는 직장을 포기하고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보다 전문적으로 일을 배워야 했다. 관청을 드나들고 농업전문가들과 교류를 통해 준비를 한 후 일본에 꿩고기 수출을 시도했다. 한편으론 꿩을 소재로 한 관광농원 지정을 받아 체험농장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가 1990년이다.

# 꿩 5만수 한 순간에 잃어 시련

그러나 그의 전업은 녹록치 않았다. 적지 않은 시련이 곧바로 몰려왔다. “한 겨울, 멀리나가 유기농 교육을 받고 있는데, 급히 연락이 왔어요. 폭설로 꿩 사육장이 주저앉았다는 거예요. 한 걸음에 달려와 보니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그것은 시련의 서곡에 불과했다. 다음해 여름, 게릴라성 집중 호우로 백암과 이동 일대가 빗물에 휩쓸려 내려가 전국 방송을 탔던 바로 그때. 황씨가 날짜까지 잊지 않고 있다. 7월 21일, 억수같이 퍼부어지는 빗줄기에 대홍수가 지면서 사육하던 5만수의 꿩을 단 한 순간에 잃고 말았다. 그저 가족들이 무사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 후 7년간을 사람같이 살지 못했죠…천재는 참아도 인재는 견디기 어렵더라구요. ”

수해로 모든 것을 잃고 나자, 단돈 1백만원도 선 듯 빌릴 수가 없었다. 인간적 멸시와 모멸감을 수없이 느껴야 했다. 당시 거액인 2억 5천만원의 빚 일부라도 갚아야 했기에 토지를 1억 5천원에 내 놓았지만 팔리질 않았다. 좌절과 실의가 컸다. 하지만 그에겐 노모와 아내, 그리고 자식이 셋이나 딸려 있었다. 딛고 일어서야 했다. 팔을 걷어 부치고 다시 나섰다. 어차피 없어진 동물사육은 포기하고 체험공간을 없앴다. 대신 야유회와 워크샵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농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수년을 삽과 망치를 들고 땀 흘리며 고생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소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주민들이었지만, 포기하고 떠날 줄 알았던 그가 재기의 구술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다가와 도왔다. 그 같은 세월을 보내길 7여년. 시골구석에 있는 황새울 관광농원이 서서히 주위에 알려졌다. 삼성처럼 대기업에서도 예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의 꿈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요즘은 아예 소규모 일반 내장객보다는 주로 기업체 대상의 영업으로 농장을 꾸려가고 있다.

# 따뜻한 이웃과 함께 만들어 가는 아이들의 고향이 있기에…

그는 이제 웃음을 되찾았다. 그리고 소중한 이웃도 찾았다. “따뜻하고 고마운 주민들이 없었다면 제가 이 곳에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었겠어요?”그래서 그는 지역 일에도 정말 열심이다. 백암 초등학교 운영위원장을 맡아 주민들과 함께하는 ‘흰바위 축제’를 구상한 것이 지금은 백암지역의 대표적인 주민축제로 자리 잡았다. 뿐만이 아니다. 백암면 체육회장을 맡아 주민 화합과 체육 육성에도 열심이다. 봉사단체인 백암로타리 회장도 역임했다. 이쯤 되면 확실한 유지급이다.

그러나 그는 ‘유지’라는 말에 손사래를 친다.

“여유 있어 하는 활동도, 알아달라고 하는 일도 아니죠.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을 찾아주고, 이들에게 희망을 만들어 준 것만으로 저는 행복할 뿐입니다.”

고향의 소중함은 그에게 특별하다. 6.25동란 중 아버지가 전사해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전국 곳곳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다행히 전몰유가족이라는 원호 대상자가 돼 고등학교까지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지만, 원호대상 특혜를 그는 누리고 싶지 않았다.

이 후 대학은 물론, 직장을 들어갈 때는 그는 이를 숨겼다. 그렇게 살아온 그에게 고향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곳에 오래 살았던, 아니면 단 일년이 됐든 내가 발 딛고 있는 삶터가 소중한 것 아닌가요?”그래서 그는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질주하는 ‘고향을 가진’큰 아들을 보면 그저 흐뭇하다.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늘어나는 인구와 성장속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정주 의식이 약하다는 점이다. 아울러 문화적 구심점을 통해 우리 고장의 자긍심이 더욱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스스로 나서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오늘도 뛰고 있다. 다만 성격대로 소리 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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