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완 목사

# 7년째 용인에서 장애아동을 위한 배움터를 일구며 장애인 복지를 위해 애써온 용인베데스다선교회의 이진완 목사(신갈·37).

“그냥…체질에 맞아서입니다. 종교적인 목적이나 사명감을 떠나서. 이상하게도 장애인 복지에 관해서 생각할 때면 자연스럽게 비젼과 구상이 솟구쳐 떠오릅니다. 다른 분야라면 억지로 생각을 해도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데.(웃음)”

이진완 목사가 장애인복지를 위해 일을 하는 이유 없는 이유다.

그는 그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자신보다 뜻 깊은 일을 오랫동안 남몰래 하고 있는 지역 어르신들이 많다며 이 지면에 그의 이야기를 싣는 것을 한사코 만류했었다.

 

                                                                            >>가족이 가장 큰 지원자.

▲ (위) 인지장애가 있지만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꿈터 하영(12)양과 야외활동 중에.
(아래) 꿈터의 공룡을 유독 좋아하는 장애아동이 직접 만든 ‘도마뱀’이라는 공작품
그의 첫마디 ‘그냥’처럼 이진완목사가 장애인사역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운명이 이쪽으로 흘렀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냥 그 길로 이끌렸다. 대학입학 시기에 품었던 장애인 사역은 원치 않는 학생운동에 휘말리면서 잊혀졌다. 그러나 그의 아내를 만나면서 이씨는 잠시 밀려나 있던 그의 운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릴 적 이 목사는 한동네에 다운증후군 형이 있어 특별히 가까이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골목에 나가면 그 형을 마주치는 것이 익숙했다고 한다. 고3때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무렵 TV에서 수화연극을 접하고는 ‘농아인들에게는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많은 신학대 중 특수교육과가 유일하게 개설된 강남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특수교육을 부전공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입학 후 신학과가 없어질 위기를 겪으며 과를 지키기 위해 학생운동을 시작한 것이, 유야무야 총학생회가 하는 운동에까지 휘말렸다. 2년여을 그렇게 보낸 이 목사는 모든 것에 회의를 느껴 다른 학교로 편입, 신학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그의 아내와 인연을 맺게 됐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는 그저 그녀의 신앙생활모습과 단아한 외모 등 평범한 연애감정으로 사랑을 싹틔웠지만 좋은 만남을 유지하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서로 같은 곳에 뜻을 두고 있다는 것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됐다. 두 살 연상인 그의 아내는 90년도에 남들이 가장 꺼려하는, 월 급여 25만원의 재활원에 취직해 그녀의 사명에 다가갔고 이 목사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가는 곳과 둘이 나누는 이야기에는 항상 장애우들이 있었다.

이진완 목사가 신학대를 졸업하는 학기에 조금은 이른 나이였지만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지금은 서로에게 가장 큰 지지자로서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과 신갈 꿈터어린이집을 함께 일구어 나가고 있다. 6학년짜리 아들과 4학년인 딸은 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더없이 잘 돌보며 두 부부의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소화해내고 있다. “잠시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장애인 사역이 아내를 만나면서 내 인생에 다시 떠올랐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힘든 길이었지만 함께 고생하며 경험을 쌓은 지금, 장애인 사역에 있어 나름대로 큰 로드맵이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뜻밖의 지급입금 위기 넘겨

지난 한 해 그에게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매달 들어오는 후원금 100~150여만원으로는 수백만원씩 매달 적자가 나기 일쑤였지만 바자회 등으로 어떻게든 매꿔 온 운영적자비를 그 달은 아무리 방법을 찾아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신용카드마저 완전히 막혔고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교사 두명이 비슷한 시기에 갑자기 그만뒀다. 이 목사에게는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무척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때를 얘기하며 이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성장의 기회였다고 말한다. 리더십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도 됐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마침 카드사에서 날아온 새로운 금융상품안내장을 보고 300만원을 대출, 급한 돈을 막으려 통장잔고를 확인한 그는 깜짝 놀랐다. 대출금 외에 1000만원이 떡하니 통장잔고에 찍혀있었던 것. 송금자를 찾아보니 다름아니라 작년에 베데스다 교사를 지낸 후 종종 일을 도와주다가 돕기로 한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닿지않았던 이였다. 이목사는 계좌번호 착각 등으로 송금사고가 난 것으로 알고 그 사람의 연락처를 어렵게 알아내 전화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제가 보낸 것 맞습니다. 장애인 사역을 위해 써주세요”하며 "그때 당시 개인적 상황으로 인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그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고 전했다 한다. 신기하게도 그가 말없이 큰 돈을 입금한 날은 바로 이 목사가 경제적 고통을 받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크게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던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적지않은 금액을 선뜻 후원금으로 내준 것과 또 그 시점이 맞아떨어진것에 정말 놀라왔고, 하나님의 섭리와 그분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지요.”

남에게 봉사를 하며 돕는 것 같지만 오히려 이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다. 천막에 사는 어느 장애인 부부는 그 추운 겨울 천막 안에 연탄난로가 있는 것에 크게 감사하며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한 단체에서 이웃 돕기 김장김치를 전하겠다고 해 부부를 찾아가 그들을 추천하겠다고 말했더니 부부는 소박하게 웃으며 ‘집 앞 짜투리 땅에 심은 배추가 서너 포기 있고 고춧가루 약간을 가지고 있다’며 그것으로 겨울을 날 수 있으니 다른 어려운 이웃에게 기회를 주라며 양보했다고 한다.

>>꿈터어린이집은 지금 공사중.

신갈 꿈터어린이집 건물 3층은 지금 공사 중이다. 1층은 장애아·비장애아 통합 어린이집으로 장애아동에게 통합교육은 절실하지만 이곳에 있는 비장애아들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회성 등 인격발달에 더욱 긍정적인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이 목사는 말한다. 2층은 장애아동주간보호센터로 비장애아동들이 다니는 공부방과 비슷한 개념으로 운영돼 왔다. 이제 꿈터공간을 3층까지 확장해 그곳에서 장애아동조기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음악치료, 미술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 등을 한데 모았다.

“장애아동 부모들은 이러한 치료기관들이 한데 모인 교육기관이 없어 아이를 데리고 하루에도 몇 코스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해야했는데 이점은 장애아에게나 부모에게나 큰 부담이었죠. 그래서 한 곳에서 여러 치료요법이 가능하기를 소망해왔고 그 소망의 첫 단계인 공간이 곧 마련될 것 같습니다.”

1층, 2층, 3층은 일단 구상된 로드맵에 따라 한발 한발 움직인 결과고 이제 중간 정도까지 진행된 것 같다는 이 목사는 조기교육프로그램 공간 외에도 몇 가지 계획을 더 언급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만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너무나 장애인 복지 분야 환경이 열악해 ‘큰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뛰어든 봉사자들도 6개월이 지나면 손에 매가 들려있더라’는 말이 많았고 그로 인해 장애인 복지에 꼭 필요한 인적재원들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자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기관, 또 장애인들의 직업훈련 리콜제로 그들이 직업인으로 안착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 훈련기관 설립 등 그의 구상을 희망에 찬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7년전 용인에 처음 장애인들을 위한 행사와 사업을 펼칠 때와 달리 지금은 그의 활동들이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 지난 주 「2005 친절과 은혜의 축제」 행사에 장애인보다 더 많은 비장애인이 참석, 이 목사가 지향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스스럼없이 어우러짐’에 한발 더 가까워진 시민들의 인식의 변화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며 모든 것에 감사해했다.

그는 오늘도 장애우들과 그의 꿈을 향해 목표대로 한발 한발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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