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같은 가족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회가 산업화와 극단적인 국가 이익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근대화를 위한 사회 초석 같은 것이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용주가 바라는 곳 어디든 옮겨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부부 중심의 핵가족이 알맞다. 남자는 나가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 일을 하는 얼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업화 초기에 ‘일하는 남자’들은 거의 집에 가지 않고 일만 했다. 바깥사람과, 집사람으로 뚜렷하게 나뉘었다.

왜 뜬금없이 근대화, 산업화 이야기인가 싶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 문제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도시 공기가 자유롭다는 말이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생겼다. 그 전, 시골, 공동체에서는 뒤 꼭지만 보아도 누가 누군지 안다. 도시에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행동거지가 자유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자. 누가 누군지 모르는 만큼 사람을 믿기 어렵다. 게다가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게 되었다. 돈 문제라면 가족들끼리도 죽고 죽였다. <옛날 옛적미국에...>(Once Upon A Time In America)와 같은 영화가 그저 '총싸움'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돈 때문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돈만 벌고 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근대화의 한 구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조직을 굳혀가는 것을 보면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유로움은 개인화를 뜻하고 개인화를 좀더 무섭게 보면, 나 하나 죽고 사는 것에 대해 옆집 사람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목을 매기 시작한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도시에서, 그래도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믿을 것은 피를 나눈 가족밖에 없다. 가족 이기주의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근대화가 만들어낸 모습이다.

우리 둘레는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아빠는 나가서 죽어라고 일을 한다. 아이들 눈에는 아빠가 돈 벌어오는 사람, 집에 오면 티브이 보는 사람일 따름이다. 엄마는 아이를 ‘제대로' 학습시키기 위해 칼을 빼들고 서 있다. 시험 성적은 아이의 성적일 뿐 아니라 엄마의 성적이기도 하다. 똑똑한 엄마들은 ‘동기'와 ‘자발성' 없는 ‘암기 기계' 같은 아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는 것은 많지만 생각하고 판단하고, 자기 삶을 꾸려가는 능력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제 그만 두기를 바란다. 두 가지 때문이다.

안타까운 이유 하나는, 불행하게도 이제는 그렇게 ‘학습시켜서는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근대화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와 있다. 사회가 짜여지는 원리가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올해만 해도 취업 기준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른다. 잘나가는 한 기업체 사장이 한 말이다.

“출신학교는 안 보려고 해요. 자발성와 창의성을 보고 사람을 뽑으려고 하는데 찾기가 쉽지 않아요."

아시는지? 영어 점수도 보지 않는 큰 회사가 많아졌다는 것을.

하나는 이제 더 이상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말을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이미 유명해진 이야기 하나. 어느 집에선가 중학생 아이 방문 앞에 이렇게 씌어 있더라고 한다. ‘우리 집에 교양 있는 척하는 여자 출입금지.' 이런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꼬리를 단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다 남의 집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면 ‘성적'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몰아갈 때 누구도 행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가족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새로운 가족 형태로 바뀔 것이다. 근대화가 내건 가치에 내몰려 나도 모르게 로봇처럼 움직이지 않았는지 한번 돌아보면 좋겠다.

/강창래(느린문화학교 교장·본지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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