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중학교 체육교사 신의자씨

▲ 신의자 선생님은
△1967 수도여자사범대학교 졸업 △67~69년 이천 양정여자중학교에서 교직 생활 시작 △69~70년 포항여자중학교 체육교사 △71~75년 용인중학교 체육교사 △75~77년 원삼중학교 체육교사 △77~84년 용인중학교 체육교사 △84~86년 백암중학교 체육교사 △93~94년 용인중학교 체육교사 △94~99년 용인고등학교 체육교사 △99~2005년 송전중학교 체육교사 △2005년 현재 용인중학교 체육교사
용인중학교 체육교사 신의자씨는 교직에 몸담은 때가 1969년이다. 그러니 햇수는 올해로 36년 됐다. 그 사이 예순 한 살(61)이 됐다. 요즘 한국사람 평균수명(75.5)이 일흔 다섯임을 감안하면 많은 나이라고 할 수 없겠다. 더욱이 신 교사와 마주앉아 이야기라도 나눌라 치면 그녀의 화사한 얼굴과 열정이 담긴 대화 때문에 나이를 가늠하기 더욱 힘들다. 하지만 앞으로 2년후인 2007년이 되면 정년퇴임을 한다는 신교사의 말을 들으면 결국 현실감각을 되찾게 된다.

신의자 선생님을 소개하는 글을 반가워하는 사람이 많겠다. 우연치 않게 신문을 들추다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 자신을 가르치던 호랑이 선생님을 발견했다면 그 자체로 재미있는 사건 아닐까. 제자들에게는 희미한 기억 속에 좋은 선생님 한 분이지만, 30여년을 용인에서 그것도 아이들 가르치는 일선에만 있던 선생님에게는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다.

승진 관리직보다 아이들 곁에서

신 교사는 교직생활 37년을 가르치는 현장에서 보냈다. 교직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일반 사람은 교사 속사정 이야기야 잘 모를 테지만, 그녀가 교원을 관리하는 관리직으로 진출하지 않고 일선에 남았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물론 관리직에 나아가지 않고 일선에서 아이들 가르친 신 교사는 단지 관리직에 나아기기 위해 노력하는 다른 일반 교사와는 남다르다 정도 표현이 적당하겠다. 하지만 여기에 굳이 특별함을 이야기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응당 신 씨는 교사로서 승진을 뜻하는 관리직 진출에 모자라는 사유가 없다는 점이다. 교육과 학생에 대한 깊은 생각과 폭넓은 지식, 아이 찾아다니는 열정, 솔직한 이야기 등은 신 교사의 자격을 자연스럽게 알려준다. 뒤에도 자세히 다루지만 용인 관내 5개 학교에서 신 교사가 해왔던 동아리 활성화와 백암중 씨름부 창단 등과 열정적인 활동도 그를 증명해 준다. 더욱이 교사로서 필요한 소양을 배우는 모든 연수도 빠진 적이 없다.

신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라며 가르치는 일선에서 남은 이유를 설명했다. 또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가 있는데, 어른들 세계가 나와 맞지 않더군요. 남들처럼 관리직 나가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는데, 마음한 번 고쳐먹었어요.”라고 말한 것이 좀더 구체적인 이유다.

신 교사가 일선 교사로서 특별한 두 번째 이유는 고령의 여자 체육교사로서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은 일이 용인에서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그렇다 신 교사는 드문 경우다. 정년 퇴임 2년을 앞 둔 지금도 학생들 대하고 가르치는 자세가 20대 초반 처음 가르치는 일 시작하던 그 시절과 다르지 않다. 재미있는 점은 36년 전 당시 신 교사 표현대로라면 오지 같던 시골 용인에 여자 체육교사는 드문 정도가 아니고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아주 특별하다고 할 만 하다.

더욱이 그녀는 학교 내에서 관리자가 되진 않았지만 지역사회와 학생들 사이에서 좋은 지도자였다. 학생들에게 동아리 축구와 씨름, 차전놀이를 손수 만들어 지도해줬고, 사범대학 시절 전공인 배구를 살려 주부들에게 배구를 지도했다. “여자도 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남자만 하란 법이 없는 것이죠.”

백암중 씨름 어머니배구단 창단

신 교사는 포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서울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배구를 전공 하던 시절 이천 양정여중에 교생 실습을 갔다 그곳 교장의 권유로 졸업 후 2년간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포항여중에서 1년간 근무하다 결혼과 함께 용인에 와서 용인중학교에 부임했다. 이때 이일이 천직이구나 하며 교사 일을 좋아했다고 한다.

“70년 경 용인은 아주 오지였어요. 메주고개길 하나 밖에 없던 때였는데…”라고 말한 신 교사는 당시 걸스카우트 활동으로 공동변소청소 하던 일과 길거리 쓰레기 줍던 일을 했다고 회상했다. 신 교사는 “용인에 처음 왔을 때, 교육이 부실했고그 중에 체육은 정말 불모지 였어요. 그 때 점심시간은 중간놀이시간이 있어서 제가 포크댄스를 가르치기도 했죠.” 용인에 포크댄스를 처음 보급한 셈이다. 당시 가을체육대회에서 소개된 아이들 포크댄스는 그만큼 인기도 좋았다고 한다.

원삼중에서 근무할 때는 아이들과 함께 한 안동차전놀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산에서 곧은 나무를 가져와 깍아서 차전을 만들고 준비했던 일. 그 때만 해도 여자 체육선생님을 처음 본 아이들은 함께 신나게 차전놀이 하던 여선생님을 잊지 못해 지금 까지도 모여 만나자고 연락을 한다.

백암중에서 씨름부를 창단했다. 지금 용인에 이름만 대도 알만한 씨름인들이 당시 신씨의 제자들이다.

“흙 날라다가 씨름장 만들고 천막을 덮고, 라면 먹여가면서 아이들 씨름 시켰죠. 백암은 장날 씨름 대회 하기로 유명하던 고장인데, 그 때문에 당시 주민들 호응도 대단히 좋았죠.”

신 교사는 70년 초에 용인에서 처음으로 어머니 배구단을 창단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요즘도 용인시 어머니 배구단은 카네이션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신 교사가 처음 어머니 배구단을 조직해 카네이션대회에 나갔을 때 역시 3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냈다.

신 교사의 체육 교육 프로그램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아리 축구다. “아이들이 볼 차는 것을 좋아해요.”

신 교사가 어느 학교에 가든 그곳에는 축구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운동을 가르치고 운동을 하게끔 유도하는 체육교사 본연의 일 중 신 교사가 힘써온 축구 동아리 활동은 가장 창조적인 프로그램이었다. 학생들은 혹은 개인적인 문제를 안고 힘겨워 하는 학생들 까지도 학교 운동장에 모여 축구를 한다. 집에 가지 않고 사고를 당할 수 있는 학생들은 신교사의 세심한 지도 속에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축구를 할 수 있었다.

열정 바친 교정 2가지 바람 이뤄

백암중에서, 또 송전중에서 때때로 학생수가 안될 때는 전교생을 3~4개 팀으로 묶어 축구팀을 만들고 시합 일정을 짜주고 학기 말에는 시상식도 하는 등 짜임새 있는 축구 동아리 활동을 이끌어 냈다. 현재 용인중에는 1~3학년 각 학년 별로 2개 팀이 있어서 매일 같이 축구를 한다. 신 교사는 시합 일정을 짜줬을 뿐만 아니라 학년에 따라 아이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매일 학원 등 다니고 하면, 실제 하고 싶은 것, 예를 들면 동아리 활동하기 힘들죠. 이 아이들 특히 체력이 부족합니다. 체격을 커졌는데 체력을 떨어졌어요. 앞으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입니다.” 신 교사의 이러한 믿음이 열정적인 체육교사 활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신 교사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계속해서 쏟아내는 다양하고 번뜩이는 교육에 대한 아이디어는 2년 뒤 정년퇴임할 교사의 것이라고 짐작하기 힘들 정도다.

“제가 교사하면서 두 가지 바람이 있었는데 요즘 다 이뤄졌어요. 하나는 도시락 싸들고 다닐 필요 없이 맘껏 밥 먹을 수 있게 하는 일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운동할 수 있는 운동장이 필요하다는 소원이었죠. 지금 급식도 하고, 좋은 시설을 갖춘 실내체육관도 있으니 그 소원만큼은 다 이뤘어요.” 라며 크게 웃는 신의자 선생님. 신 선생님을 보고싶은 제자가 있다면 용인중학교로 찾아가면 된다. 37년 그때 그 모습으로 여전히 우렁차고 씩씩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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