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즘 집에선 냥집사로, 출근하면 식물 집사로 변신한다. 분주히 아침을 준비하고 남편 출근과 아이 등교를 마치고 나면 고양이와 개밥을 챙겨주고, 부랴부랴 강아지 산책 준비를 하며 짧고 굵은 산책을 정신없이 다녀온다.

귀한 몸값을 자랑하는 몬스테라.
귀한 몸값을 자랑하는 몬스테라.

낮 동안 혼자 있을 ‘녀석’이 안쓰럽고 미안해 나름대로 정해놓은 생활 습관이다. 그렇게 집에서 정신없는 2시간을 보내고 출근해 식물 집사로 변신하는 순간, 밤사이 공간을 가득 메운 식물들의 향기가 필자를 반겨준다. 아이가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듯 식물들이 필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한 분위기는 묘한 기분과 만족감을 선사한다.

이 만족감은 특히 월요일 아침이 크다. 주말 동안 필자의 공백을 식물들은 몸으로 표현한다. 물이 부족해 말라가는 모습이나 누런 잎을 달고 있는 모습, 다행히 시들지 않았더라도 생기가 없는 녀석 등 단 며칠의 공백을 저렇게 애써 표현하니 월요일 아침 출근길엔 발길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일단 급한 녀석들 먼저 물세례를 주고,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식물에게 차례차례 돌봄 서비스를 시작한다. 아침에 눈 뜨면 밥 달라고 앵앵거리는 고양이 마냥, 식물들도 몸으로 표현한다.

삽목한 제라늄
삽목한 제라늄

어떤 식물은 ‘얼른 물을 달라’ 또 어떤 식물은 ‘나는 햇빛이 필요하다’, ‘답답하다, 환기를 시켜다오’ 라며 필자에게 말을 건넨다. 조급해하지 말고 차례를 기다리라며 각자에게 맞는 처방을 내린다. 엄마처럼, 혹은 의사처럼.

식물마다 맞춤 서비스를 하다 보니 정이 들어 필자에겐 귀하지 않은 식물이 없다. 그렇지만 세상의 상대적 가치는 분명 존재한다. 사람들이 “이거 얼마예요?” 하고 물으면 어떤 식물은 매우 높은 가격에 바로 대답하기 조심스럽고, 어떤 식물은 편안하게 “몇천 원이요” 라고 대답하니 흔하냐 흔치 않으냐,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의 많고 적음의 차이, 식물을 키우기 위해 소비한 노력과 시간 등으로 식물 세계도 금전적 계급이 있기는 하다.

‘몬스테라 델리시오사 버라이어티 보르시지아나 알보 바리에가타’ 이름이 너무 길어 따로 메모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 식물은 요즘 식물테크 또는 식테크로 무척 유명한 식물이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엔 잎사귀 일부가 허옇게 탈색된 특이한 식물 그 이상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 색깔 돌연변이에 귀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 즉 비싼 가격을 기꺼이 치른다. 이름이 긴 이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조금은 의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릴 적 부모님이 애지중지하던 난(蘭)을 생각하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먹지도 못해 쓸모 없어 보이는 식물의 가치에 대한 촌스러운 반감이나 무지한 오해가 값어치 있는 식물을 키우고 있다는 보람보다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해주는 삶의 소소한 활력소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아마 매일 마주치는 마을 어귀 커다란 느티나무와 주변 오래된 소나무의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을 알곤 놀라움을 가진 것, 그뿐인 것처럼 내 것이 아니기에 단순한 관찰로서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삽목한 제라늄
삽목한 제라늄

귀한 몸값을 자랑하는 제라늄을 삽목했다. 꽃 색깔이 예쁘거나 이파리 색깔이 특이하고, 결정적으로 키우기 어려운 종류들이 비싼 몸값을 자랑한다.

까다로운 녀석들에게 기꺼이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는 것이 식테크의 의미보다 생명을 키우며 심적 안정과 공감을 키우는 반려식물로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그 정신적 즐거움에 더해 나의 자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었으면 하는 소심하지만 속물적인 바람도 얹어 정성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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