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 출신CEO…기술력으로 대한민국 고무소재 산업 강자 등극”

“고무가 사용되지 않는 공산품이 없을 정도죠. 자동차, 기계, 정수기에 이르기까지 수명의 한계와 내구성은 고무가 좌우하는 셈입니다.” 용인에서도 비교적 한적한 이동면 묵리에서 만난 ㈜크라이부르그고무 김창희(58) 대표이사는 외모부터 학자풍이다. 빔프로젝터를 활용해 들려주는 고무에 대한 설명 역시 뛰어난 교수의 강의처럼 흥미롭고 쏙쏙 귀에 박힌다. 받아든 명함에도 대표이사 외에 ‘연구소장’ 직함이 앞자리에 놓여있다. 그의 자부심과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읽혀진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우리나라 굴지의 고무 소재 연구개발과 생산 판매회사인 ㈜크라이부르그고무. 그 중심에 있는 김 대표의 외길 ‘고무’ 연구인생은 20대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운명처럼 다가왔다. “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했어요. 공개채용을 통해 전자업체 대기업과 중소기업 K고무롤 두 회사에 합격을 했는데, 저는 큰 고민 없이 중소기업을 택했죠.”

시국은 어지러웠지만 한창 경제 붐이 일던 1986년, 사회초년생 김창희는 이미 큰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입사한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되고 싶었다. 포부가 남달랐던 만큼 시야가 넓었고 일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랐다. 취업 이태만인 약관 28세 나이에 회사 개발실장을 맡았다. “당시엔 주위로부터 시기의 눈길도 느꼈죠.(하하) 경영진에서 전폭적인 믿음을 줬기 때문이었어요. 밤낮을 안 가리고 일했는데 나에게 소중한 자산을 축적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죠.”

 

엔지니어를 넘어 CEO를 꿈꿨던 청년 김창희

 

회사에서 만든 제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회사도 성장했다. 그런 만큼 그의 직책도 높아져 경영총괄팀장에 이르렀다. 하지만 좋은 시절만 지속되진 않았다. 어려움이 닥쳤다. 바로 IMF에 의한 외환 위기였다. 설상가상으로 제철, 섬유, 인쇄 등에 사용되던 고무소재 부품은 관련 산업이 사양화 되면서 회사 역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위기가 닥치자 내부도 흔들렸다. 경영권 다툼이 시작되고 그는 와중에 희생양이 됐다. 그 순간 새로운 결심을 했다. “애초 최고의 엔지니어를 넘어 경영자를 꿈꿨던 만큼 그냥 시기가 좀 빨리 온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죠. 2년여 동안 내 인생의 프로젝트를 다시 설계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회사에 사표를 던진 그는 지인의 소개로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방 속에는 돈이 아닌 사업계획서만 들어있었다.

“당시 독일 크라이부르그고무 본사에서 만난 최고경영자를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복도에서 작업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만났어요. 나중에 대표 면담을 하게 됐는데 바로 그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말쑥한 신사의 품격을 하고 있었죠. 현장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갖추고 진지한 만남을 위해 옷까지 갈아입는 독일 대표의 자세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화는 순조로웠다. 오직 실력과 비전을 중시하는 합리적 독일 기업가는 아시아 최고의 엔지니어이자 CEO를 꿈 꿨던 김창희를 알아봤다. 그리고 전격적인 제안을 했다. 자본금을 줄 테니 밑에서 일하지 말고 한국에서 합작 회사를 경영해 보라는 거였다. “어리숙해 보였거나 엔지니어의 열성을 읽은 것으로 생각했어요. 싹수를 본 것이죠.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독일문화를 그 때 확인하는 순간이었어요.” 돌아올 때 그의 명함은 ㈜크라이부르그 한국 공동대표였고, 몇 년간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자본금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크라이부르그고무는 1946년 독일 Wald KRAIBURG에서 2차 세계대전 직후 창업을 한 회사이다. 당시, 폐허나 다름없었던 독일의 산업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인의 근면성과 정열 그리고 과학기술이었다. 크라이부르그고무는 독일의 화학기술, 고무 가공기계를 기반으로 세계 고무기술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사는 1970년대까지 건축의 바닥, 자동차재료, 일반산업용재료를 생산하면서 자동차 산업이 주축이 된 1990년도에는 매출액의 50%를 자동차 부품에 공급하고 있다. 한국크라이부르그고무는 독일의 기술과 경영노하우를 기반으로 50% 지분을 공유해 김창희 대표와 공동대표 체제로 운영하게 된 것이다.

 

고무소재 각종 제품

 

용인에서 꿈꾸는 고무소재 산업의 신화

 

밀레니엄의 2000년, 안산에 처음 자리잡은 한국법인은 독일에서 생산한 제품을 판매만 하는 형태였다. 2004년 용인으로 이전하면서 오늘날의 소재연구와 생산, 판매까지 담당하는 온전한 회사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한국에서의 사업도 처음부터 승승장구는 아니었다. 사업 초기 그는 친구와 여직원만이 있는 회사에서 무려 2톤에 달하는 고무를 식칼로 잘라야 했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판로개척을 위해 찜질방과 자동차에서 쪽잠을 자가며 전국을 돌았다. 더구나 외환위기 이후 불경기가 이어지면서 10여 년간 적자 상태를 버텨야 했다, 그가 블로그에 남긴 2008년 기록은 이렇게 적혀있다.

“4월 9일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날, 제 8기 크라이부르그고무 이사회가 열렸다. 당기 순이익 324만원. 보통 월급쟁이 한 달 월급이다. 주위 환경에 대한 많은 도전 속에 힘들게 방어해 적자는 모면한 것인데… 이런 날 믿고 지원해 주는 독일 사장 Mr. F Schmidt와 Dr.A Zellner, Mr. Hans Langbauer…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제 올해는 명실상부한 흑자를 내야겠다.”

10여 년이 흐른 오늘 ㈜크라이브르그고무는 안정적인 경영기반을 갖추고 성장 중이다. 무엇보다 기술경쟁력을 앞세운 김창희 대표의 경영철학은 끊임없는 시장의 변화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이동면 묵리, 318지방도로에 접한 아담한 회사에는 태극기와 독일 국기가 함께 펄럭인다. 그 안에선 오늘도 김창희 대표가 대한민국 고무소재산업의 자존심을 걸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김창희 대표이사의 경영 노하우

○ 큰 꿈을 꿔라

“회사에 입사할 때부터 최고경영자를 목표로 삼았다. 회사의 선택도 그것이 기준이 됐다. 포부가 큰 만큼 보이는 게 달랐다. 경영자라면 이 일을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신임을 얻었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후일 꿈은 현실로 나를 안내했다.”

○ 문화를 창조하라

“고무산업의 측면에서 볼 때 독일은 물성을 따진다. 음식으론 치면 맛이 없는 레시피다. 반면 제품은 우수하고 오래간다. 우리 제품은 물성이 떨어진다. 맛을 내기 위해 각종 조미료를 치는 것과 같다. 결국 불순물이 들어갔기 때문에 소비자에겐 해가 된다. 나는 고무산업의 영역에서 좋은 음식을 만드는 새로운 고무문화의 창조자가 되고 싶다.”

○ 사람에 투자하라

“독일 크라이부르그고무와 합작회사를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실력과 비전을 중시하는 합리적 독일 기업가 정신의 결과였다. 나에겐 당시 비전과 열정만이 있었다. 그럼에도 엔지니어 출신인 나에게 CEO를 제안했다. 싹수를 본 것이고 사람을 보고 한 투자였다. 이후 나 역시 사람의 싹수를 첫 번째 조건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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