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연수구에 있는 인천 이씨 중시조 이허겸의 묘려인 원인재 전경. 인천 이씨 대종회 홈페이지 캡처.

인천 이씨의 연원
인천 이씨는 허씨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허씨는 가야국 김수로왕의 부인이 허씨인데 둘 사이에서 큰아들은 김씨 성을 이어받고, 둘째 아들은 어머니 성인 허씨 성을 이어받았다 한다. 이 허씨의 후손 중에 허기(허황후의 23세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당에서 이씨 성을 사성(왕이 내리는 성) 받아 인천 이씨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인천 이씨의 유래는 허기(許奇)라는 사람이 신라 때 하찬(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등) 벼슬을 할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한다. 때마침 당나라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당 현종이 촉나라로 피란을 가게 됐다고 한다. 현종이 피난 갈 때 외국사신으로서 위험을 무릎쓰고 호종(왕을 모시고 피난하는 일)했다고 하는데, 난이 평정된 후 황제가 도성에 돌아와 이를 가상히 여겨 시서와 함께 황제의 성인 이씨 성을 내림에 이씨가 됐다고 한다.

귀국 후 신라 경덕왕(신라 35대왕)이 그의 공을 높이 사 서성백 작위와 식읍 1500호를 내리며 세습하게 됐다. 이로써 허씨에서 이씨가 됐으니 공의 후손들은 이허기 선조를 득성조(得姓組)라 하고 있다. 득성조 이허기의 후손들은 인천 소래산 인근에 거주하며 대대로 신라에 벼슬하며 가문을 이어오다가 10세에 내려와 이허겸(李許謙)이 고려 현종(재위 992~1031) 때 상서좌복야를 지내면서  귀족 대열에 올랐다.

이후 후손들은 이허기를 인천 이씨 득성조로 하고 이허겸을 시조로 삼아 계대를 이어오게 되었다. 시조공의 묘소는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에 있으며 묘원에 사당인 원인재(源仁齊)가 있다. 원인재는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인근 역 이름을 원인재역이라 한다.

처인구 남사면 봉명리에 있는 이성동 묘역

본관지 유래
지금의 인천은 백제시대 미추홀이라 불리던 곳이며 고구려 때는 매소홀현이라 했다. 이후 신라 경덕왕 때 소성으로 고치고 고려 15대 왕 숙종(재위 1095~1105) 때 경원, 인종조에는 다시 인주로 지명이 변경됐다.

고려 때 이러한 지명 변경은 인천 이씨 외손 8명의 왕을 배출하면서 어향(御鄕)이라 불릴 정도였으므로 지역명이 승격에 승격을 거듭하면서 지명이 변경돼 왔다. 또 공양왕 2년 경원부로 승격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오늘의 인천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이러한 지명 변경으로 오늘에 인천 이씨는 소성 이씨, 경원 이씨, 인주 이씨라고도 한다.

고려 명문 반열에 오르다
신라시대 득성하고 나말여초에 인주지방의 호족세력에 불과했으나 시조 이허겸의 외손녀가 현종(고려 8대왕)의 비(원성태후)로 책봉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이허겸의 손자 이자연이 현종(재위 1009~1031)조에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 1050년에 내사시랑평장사(정2품 관직)가 됐다.

그의 딸 셋이 문종(11대, 재위 1046~1083)의 비가 됐고, 그의 외손자가 12대 순종, 13대 선종, 15대 숙종이 돼 당시 고려의 최고 가문 반열에 오르게 됐다. 그는 국가로부터 3000호의 식읍을 받았고 장화(章和)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문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자연의 손자 이자겸(李資謙, ?~1126)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당시 최고의 권력자로 등장하고 신하로서는 가질 수 없는 권력을 장악하게 됐다. 이에 인종(17대, 재위 1122~1146)은 자겸의 동지인 척준경을 통해 자겸을 영광으로 유배보내게 했으며 자겸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연과 자겸은 고려시대 외척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으며 또한 인천 이씨를 당시 최고의 문벌 반열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다.

원인재 내에 있는 장명재공파 파조 이인로 문학비

인천 이문의 파와 인물

어느 가문이든 계대를 이어가며 여러 파로 분적돼 가문을 이어오듯이 인천 이문 또한 여러 파로 분적되면서 가문의 성쇠와 같이 했다. 주요 파로는 7세손인 이문화의 후손들을 공도공파, 8세손인 이작신을 파조로 하는 시중공파, 이징옥을 파조로 하는 충강공파, 이인로를 중심으로 한 쌍명재공파가 있다.

용인 남사 지역의 인천 이문은 주로 공도공 이문화의 후손들이다. 공도공파조 이문화(李文和, 1358~1414)는 이색·정몽주 문하에 왕래하며 권근, 이숭인 등과 교유했으며 1380년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조선조에 들어와 예문관 대제학,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향년 57세로 서거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면서 3일간 조회를 중지했다 한다.

사후에 공도(恭度)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영의정에 추증됐다. 그의 묘소는 광주에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천안으로 이장했다. 아울러 오천재를 이전 확장해 숭모정신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또 장흥의 금계사, 대구의 서계서원, 함안의 도천사에 배향됐다.

상명재공파의 파조 이인로(李仁老, 1152~1220, 호 쌍명재)는 8세손으로 고려 최고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공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화엄종 승려에게 양육되고 교육받았다 한다. 공은 총명해 유교경전과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해 학자로서 자질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19세 되던 해에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 문인들을 제거하자 쌍명재는 불문에 귀의하기도 했으나 환속 후 그의 나이 29세 되던 해에 과거에 장원해 명성을 날리게 됐다. 31세 되던 해에 서장관으로 중국에 들어가 정월 초하루 시를 지어 그들에게 보이니 칭찬이 자자했다 한다.

그 후 고려 사신이 중국에 들어가면 언제나 쌍명재 안부를 물을 정도로 그의 시가 중국에 잘 알려진 시인이며 학자이다. 저서로는 은대집, 쌍명재집, 파한집이 있다 하나 파한집만 전해지고 있다. 파한집은 최자의 보한집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이며 당시 궁성, 사찰 등풍물을 기록해 당시 문화를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충강공파의 파조 이징옥(1399~1543)은 무과에 급제한 무관이다. 여진 정벌과 방어에 진력을 기울이며 김종서와 함께 4군6진 개척에 공이 큰 장수이다.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을 때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이징옥은 김종서의 수하라 해서 파직됐다. 이징옥 장군은 수양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면서 병마를 이끌고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라 자칭하면서 세조에 반기를 들었으나 패해 피살당한 비운의 장수였다.

이징옥은 당시 사대사상에 물들었던 조선 사회에서 황제국이라 지칭하는 자주적 행동에 주목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시중공파 파조 이작신(李作臣)은 충렬왕조에 급제해 문하시중(종 1품)을 역임했고 그의 딸이 공민왕비가 됐다. 공은 재상으로서 공민왕이 신돈에게 현혹되자 이를 비판하다 삭탈관직 당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그의 후손들을 시중공파라 하며 주로 부산인근에 세거하고 있다.

용인 남사의 인천 이씨
남사 세거 성씨로는 능성 구씨, 안동 권씨, 언양 진씨 등이 있다. 이 성씨 중 언양 진씨가 고려 말부터 세거해온 것으로 보이며 그다음으로 인천 이씨가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 이씨의 남사 입향조는 16세 이수량(李守良, 생몰 미상)이며 어떤 연유로 이곳에 왔는지는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처인구 남사면에 있는 이성동 묘포

입향 시기는 중종조에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한 19세 이성동이 조선 중종조 인물임으로 봐서 15세기에 남사로 입향한 것으로 보인다. 남사의 인천 이문은 인천 이씨 여러 파 중 이문하를 파조로 하는 공도공파 후예들이며 이들은 남사 전역에 거주하고 있다.
남사 인천 이씨 인물로 입향조의 고손인 이성동(李成童, 생몰미상, 호 졸옹)을 들 수 있다. 공은 연산군 1년(1495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처 대사간(정3품)에 이르렀다. 공이 대사간으로 있을 당시 중종반정에 공이 없는 사람이 공신의 반열에 올라 국가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는 폐단이 있었다.

대사헌 조광조, 대사간 이성동이 함께 이런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공이 없는데도 공신이 된 인물들을 삭제하자는 소위 위훈삭제상소를 올려 가납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로 소위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림들이 피해를 보게 됐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가 투옥됨에 ‘나도 함께 투옥하라’고 자청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묘명현 중 한 분으로 그의 묘가 처인구 남사면 봉명리에 있다.

남사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 이씨가 50여 호 거주하고 있었으나 산업화에 따라 현재는 20여 호에 불과하다. 후손들은 매년 10월이면 조상의 묘에서 시제를 올리며 남사 인천 이씨 종친회를 조직해 친목을 도모하고 조산의 유훈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현재 종친회장은 이한철이 맡고 있다. 이곳 출신으로 사회에 공헌한 분은 수원교육장을 역임한 이보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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