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치는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 한터마을에서 동쪽 용화사 방향으로 말치골을 지나 정수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정수리에는 작은 말치고개가 있고 더 아래편으로 말치들이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에 속한다.

또 원삼면 학일리에도 말치가 있는데 고초골에서 서남쪽으로 안성 미리내 천주교성지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고초골 위편을 말치골이라고 부르고, 그 위에 있는 고개가 말치인데 마치라고도 발음한다.
말치는 한자로 마치(馬峙)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대리의 말치는 <조선지지자료>에 말치령(末峙嶺)으로 쓰고 말치고개라는 한글 이름이 붙어 있으며, 학일리의 말치고개는 한자표기는 없고 우리말 이름만 표기돼 있다.

말치는 말티와 같은 말이다. 끝에 고개가 붙어 한 단어처럼 쓰이기도 하는데 역전 앞이나 초가집과 같은 첩어이다. 말치의 어원은 말티인데 우리말의 ‘-티’는 고개를 나타내는 우리말어미이다. 한자로 옮기면 치(峙)가 되는데 말티와 말치는 끝이 한자라는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말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말티는 속리산으로 넘어가는 말티고개이다. 일찍이 조선 세조가 이 고개를 넘을 때 타고 오던 연(임금이 타는 가마)으로는 도저히 고개를 넘을 수 없어 말로 갈아타고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유래가 전하고 있다. 위의 말티고개 유래처럼 거의 모든 말치나 말티는 말과 관련된 유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전국의 수많은 말티나 말치, 마치(馬峙)를 찾아보면 말과 관련이 없는 지명이 없을 정도이다.

말은 우리말로 크다는 뜻을 가진다. 말벌이나 말조개 같은 말은 큰 벌이나 큰 조개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말-’은 크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따라서 말치고개는 큰 고개라는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 말치나 말티의 말이 산꼭대기를 뜻하는 ‘마리’나 ‘마루’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를 따른다면 말치고개는 ‘산꼭대기에 있는 고개’란 의미가 된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록이 학일리 고초골 위에 있는 조중회(1711~1782) 선생의 묘표이다. 조중회 선생은 본관이 함안으로 영조 때 문신인데 여러 해 전에 방영됐던 ‘입조일기(入朝日記)’를 남긴 분이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됐을 때 영조 임금에게 그를 살려줘야 한다고 극간하다 유배되기도 했으며 그 뒤에 풀려나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사위 홍낙빈이 당시 천하를 울렸던 세도가 홍국영의 숙부이므로 그에게 아부하려는 사람이 많았으나, 성품이 곧고 결백해 주위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 이름을 떨쳤다.

선생의 묘표에 고치동(高峙洞)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말 그대로 높은 고개가 된다. 즉 말치 뜻을 따라 마치가 아닌 고치로 쓴 것이 분명하다. 고치가 나중에 고초>고추로 변화돼 한자표기가 고초(枯草)로 바뀌고 오달제 선생과 연관 지어 ‘풀이 말랐다’고 하는 유래로 변질된 것이다. 1899년의 <죽산부읍지>에는 고초(古草)로 나타나고 있는데 풀이 말라죽어서 고초가 아니라 고치동이 고추로 변화되고 앞의 유래가 덧붙여졌던 것이다.

한터의 말치고개는 좀 나은 편이지만 고초골의 말치고개는 풀 속에 묻혔는데 예전에 김대건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의 선구자들이 전도를 위해 넘나들던 고개이고, 후에 천주교 신자들이 미리내 성지를 오가던 길목이었다. 고초골을 비롯해 주변에 천주교우들의 피란지가 많은 것도 미리내 성지와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은 양지면 은이성지에서 미리내까지 성지순례길이 개발돼 있는데 이번 기회에 말치고개 순례길도 열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미 능선 위는 등산객들이 다니는 오솔길이 제대로 나 있으니 잘하면 또 하나의 둘레길이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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