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진씨

진씨는 희성이나 우리나라 역사에 많은 공헌을 한 성씨 중 하나이다. 진씨는 한자로 진(秦)자를 사용하는 전주, 풍기 진씨가 있고, 진(晉)자를 사용하는 남원 진씨, 진(眞)자를 사용하는 서산 진씨. 진씨 중 가장 번성한 베풀 진(陳)자를 쓰는 성씨가 있다. 성씨를 본관별로 분류해보면 명나라 태조로부터 문열이라는 시호를 받은 진보재의 손자 진리(陳理)를 시조로 하는 양산 진씨,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귀화한 진린(陳璘)을 시조로 하는 광동 진씨가 있다. 또 송나라 때 복주 출신 진수가 우윤 벼슬을 하다가 난을 피해 바다를 건너 고려 여양현(현 충남 홍성군 장곡면) 덕양산 아래에 살다가 그의 후손 진총후가 고려 예종조 (1106~1112)에 벼슬해 상장군 겸 신호위대장군으로 척신<이자겸>을 토벌한 공훈으로 여양을 봉읍 받으니 후손들이 여양을 관향으로 삼아 대대로 살고 있다.

여양 진씨의 선계

앞서 밝힌 대로 여양 진씨의 선계는 송나라에서 우윤 벼슬을 하던 진수가 고려에 귀화해 여양현 덕양산 아래 기거하면서 여양 진씨의 선계를 이뤘다. 고려 제17대 인종(1122-1246) 때 외척 이자겸은 십팔자(十八子=李)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에 따라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진총후가 신호위대장군(고려시대 중앙군 최고관직인 상장군 다음가는 관직)에 오르고 여양군에 봉해진 후 후손들은 여양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양군 후손들 중 출중한 인물에 따라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달리하게 됐다.

분파된 본관으로 신광 진씨, 경주 진씨, 강릉 진씨, 삼척 진씨, 나주 진씨, 진산 진씨로 분파됐다. 그러나 이들 모두 진총후의 후손들이므로 1992년 여양 진씨 대동보에 합본해 현재는 본관을 여양 진씨로 하고 있다. 본관지 여양은 현재 충남 홍성군 장곡면 일원을 일컫는다.

여양은 백제시대 사시량현이라 불리다가 신라 때 신량현이라 불리던 곳으로 여러 번 지명이 변경됐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현재의 홍성군 장곡면으로 불리게 됐다.

여양 진씨 진총후의 아들 진준은 병부상서(고려시대 정3품 관직)에 오른 후 무인 가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아들 5형제가 문명을 떨쳤다. 이후 여양군의 증손 대에 여양 진씨는 5개 파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중(종1품 수상직)을 역임한 담의 후손들은 시중공파, 서경 유수를 역임한 식의 후손들은 어사공파, 문과에 급제해 학문에 밝고 척불숭유를 주장했던 온의 후손들은 예빈경파,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규보와 쌍벽을 이뤘던 화의 후손들은 매호공파, 전농지사를 역임했던 택의 후손들은 전농공파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5개 파 중 매호공파가 가장 번성했다 한다.
 

매호공과 창양군 신도비

 

 

 

문무 겸비한 여양 진문

여양 진문은 고려 중기 진총후가 관계에 진출하면서 가문을 빛내기 시작했다. 시조 총후의 아들 준(?-1179)은 용맹과 담력을 갖춘 인물로 군졸로 진출해 공로를 쌓아 대장군을 거쳐 고려 명종 5년(1175) 판병부사로 승진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가 북계를 수비할 때 장군은 복두를 쓰지 못하게 됐는데 진준은 관례를 깨고 그대로 l복두를 쓰고 다니자 탄핵을 받아 면직될 정도로 기개가 있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복직해 있을 때 의종 24년(1170)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 많은 죄 없는 문신들까지 도륙하자 진준은 문신들을 변호하며 죽임을 면하게 했다.

이로 인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유음덕 후필창’이라 해 “진준의 후손들은 음덕이 있으니 뒷날 반드시 자손들이 번창할 것”이라고 했다 한다. 그 음덕 덕분인지 아들 오형제 중 대장군이 4명, 상서 1명을 배출해 여양 진문이 무반의 가문으로 번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진준의 손자이며 시조 진총후의 증손인 ‘담’은 시중, ‘식’은 유수, ‘온’은 예빈경, ‘화’는 우사간, ‘택’은 전농시사에 올라 진문의 명성을 날렸다. 특히, 진화(110? - ?, 호 매호)는 당대의 대문장가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의 형 ‘식’, ‘온’ 또한 시문으로 이름을 날려 세간에서는 이들 형제들을 구슬에 비유해 연주라 칭송했다.
매호 진화는 한림별곡 제1장에서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이라고 했듯이 주필로 이름난 시인으로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다. 명종이 신하들에게 <소상팔경>에 대한 시를 짓도록 했을 때 어린 나이로 장편을 지어 이인로와 더불어 절창이라는 평을 받았다. 1198년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200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고종 2년(1215)에 관각제공에게 부시(賦詩) 40여운(韻)을 시험했는데 이규보가 수석을 차지하고 그가 차석을 했다. 서장관으로 금나라에 다녀온 뒤에 정언에서 보궐을 거쳐 우사간이 돼 지공주사에 보직됐다가 재직 중 사망했다.
 

매호 진화 묘역 전경(처인구 남사면 원암리 소재)


그의 시는 현재 59수가 전하고 있는데, 그 중 무신의 난 이후 피폐한 농촌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도원가>가 특히 유명하다.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지은 <사금통주구일> <봉사입금> 등도 그의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봉사입금>은 당시 아세아 정세와 고려의 앞날을 예언한 명시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관인으로서 면모를 보여주는 시와 자연을 청담하게 표출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이들로 인해 여양 진문이 문무를 겸비한 가문으로 현달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착실히 가문의 기반을 다져 문과 급제자 수가 27명에 이른다. 그러나 기묘사화(1519년) 때 화를 당하자 진씨 일문은 벼슬을 버리고 은둔해 그늘을 걷게 됐다.

그런 가운데 부제학 대사간을 역임했던 진식(1519-1568)은 당시 최고 권력자 김안로와 그 일파를 탄핵한 기개 높은 인물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종군해 활동 중 당포해전 승리에 공헌하고 진주성이 왜군에 포위돼 위험에 처했을 때 적정을 탐지해 승리하는데 공을 세운 진무성(1566-미상) 장군이 명문임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 후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판소리 명창으로 잘 알려진 진채선(1847-?)은 풍류 가곡과 무용에 능했고, 여성으로서 웅장한 판소리 가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재 여러 여성 명창을 길러 내는데 밑거름이 된 인물이다.

현대 인물로 제헌 국회의원과 제10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던 진헌식, 카이젤수염으로 잘 알려지고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던 진복기, 4선 국회의원이며 제5공화국 시절 국무총리를 역임한 진의종, 3대 정권에서 한 번의 부총리 5번의 장관을 역임해 직업이 장관이란 별호가 붙었던 진념, 삼성전자 사장을 거쳐 정보통신부장관을 역임한 진대제, 전 보건복지부장관 진영, 시사평론가로 유명한 진중권, 여성 정치인 진수희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층에 수많은 인물들이 여양 진문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용인 제일의 씨족 촌을 이루다

용인의 여양 진씨 후예들은 매호 진화(고려 중기)를 입향조로 800여 년 간 처인구 남사면 원암리에 세거해 오고 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100여 호에 이르렀다고 하나 세월의 변화에 따라 삶을 찾아 각지로 흩어졌다. 하지만 현재에도 50여 호가 선조의 유택을 관리하며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세거지 원암마을 이름은 고려 말 매호공 증손인 진사문이 조정에 벼슬을 할 때 국가에서 민심은 도외시하고 불사(佛事)에만 치중하자 이를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원암리에 은거해 살았다고 한다. 이 때 개성으로부터 김용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진사문은 흥왕사 참변 소식을 듣고 남촌면 천덕산에 올라가 개성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고려 사직을 걱정하다가 식음을 전폐하기 10여일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원통해 하고 슬퍼하던 곳” 이라 해 마을 이름을 원암(寃暗 원통하고 암울함)이라 이름했다 한다. 그 후 마을 이름이 변음돼 원암(元岩)으로 바뀌어 현재 원암리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암리의 입향조는 매호공이 죽은 뒤 원암리에 안장하고 그 후손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원암리에 여양 진문이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뤄 입향조는 매호공으로 유추할 수 있다. 매호공의 후손 진사문이 이곳으로 낙향한 것, 증조인 매호공 묘소가 있고 집안들이 세거한 것으로 보아 이는 용인 전체 성씨 중 가장 먼저 세거한 성씨라 할 수 있다.
 

창양부원군 진사문 묘사 사진


용인에 고려시대 인물에 의해 씨족 촌을 이룬 곳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14세기)를 모현면에 모신 후 모현면 일원에 씨족촌을 이룬 연일 정씨가 있다. 두문동 72인의 한 분인 이석지 선생의 묘소(14세기)를 양지면 주북리에 모시면서 양지 일원에 영천 이씨가 씨족촌을 이뤘으며, 해주 오씨 선조인 오희보 선생의 묘소(13세기)를 원삼면에 모신 후 원삼·모현 일원에 해주 오씨가 씨족촌을 이뤘다. 이 세분의 묘소를 조성하기 이전 남사면 원암리에 여양진씨 매호공 진화의 묘소(13세기 초)를 조성함으로서 여양 진씨가 동족촌을 이뤘으니 이는 용인 씨족촌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원암리 진씨들은 과거에 출세해 특별히 명망있던 인물은 많지 않다. 그러나 구한말 때 구성면장을 역임하면서 면민 구휼에 힘써 면민들이 불망비를 세워 높이 칭송을 받았던 진효일(성일), 용인군수를 역임하였던 진용관, 교육자로 태성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진태범이 있다. 현재 경기도의회 의원 진용복이 의회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그리고 장애 학생들을 위한 특수교육에 전념하면서 선조들의 유업을 계승시키고 숭조사상 고취에 노력하는 진길장이 있다.

원암리 진문은 입향조인 매호공 진화와 그의 증손 창양부원군 진사문 시제를 매년 음력 10월에 올리며 묘제에는 전국 각 문중에서 해마다 약 100여명 이상이 참석하는 큰 행사로 거듭나고 있다. 매호 진화 묘소는 용인 향토유적 제31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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