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이불 밟고 떠나는 겨울산행(2)

오마이뉴스 김강임(kki0421) 기자
▲ 눈보라가 몰아치는 1500고지 진달래밭
ⓒ2005 김강임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겨울 산행의 찬가였다. 성판악 해발 750고지에서부터 3.5km를 걸어 왔더니 얼굴은 눈사람인데 등에서는 후줄근 땀이 솟는다.

등산로에 깔린 하얀 눈은 마치 솜이불 같았다. 그게 언제였더라. 큰언니가 시집가기 달포 전, 어머니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하얀 명주솜을 깔아 놓으셨다. 그리고 솜이불을 꿰매셨다. 그때 내 나이 열네 살, 나는 어머니가 깔아 놓은 하얀 솜이불을 맨발로 첨벙대며 밟고 다녔다. 그때 큰딸을 시집 보내는 어미의 애타는 마음을 내 어찌 알았으랴!

▲ 다시 걷기 시작하다
ⓒ2005 김강임
눈 덮인 겨울 산행에서 느끼는 발의 촉감도 그러했다. 포근하고 따뜻한 어머니께서 만들었던 솜이불에 대한 기억처럼, 그것이 겨울 산행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앞서가던 남편은 배낭 속에서 초콜릿을 꺼내 내 입에 물려 준다. 달작지근하면서도 쫄깃쫄깃한 초콜릿의 맛이 겨울 산행의 에너지를 더해 준다.

▲ 드러누운 겨울나무처럼 피안의 세계로
ⓒ2005 김강임
하얀 목도리를 한 겨울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드러누워 있다. 그리고 하얗다 못해 눈이 부신 설국 속에 드러누운 사람들이 이 겨울의 주인공이다. 일상의 찌든 공간 속에서 피안의 세계로 달려왔음일까? 편안하고 넉넉한 풍경이다.

▲ 표지판도 눈에 덮여
ⓒ2005 김강임
6.1km. 흰 눈에 푹 빠져 깊은 시름을 앓고 있는 표지판이 가까스로 산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다. 여기서부터는 오르막길이다. 성판악 코스에서 오르막길이라야 그렇게 급경사는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다. 평평한 길을 걷다가 조금만 경사가 져도 힘이 드니 말이다.

▲ 이어진 급경사에서 밧줄을 잡고
ⓒ2005 김강임
앞서가던 남편이 뒤로 물러서더니 등을 밀어 준다. 힘이 들 때 누군가가 옆에서 조금만 부추기면 거뜬해지는, 인간의 간사함이랄까?

▲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2005 김강임
1500고지에 가까워질수록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 한치 앞도 분간이 어려운데 눈보라는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마저 매정하게 지워 버린다. 이때 등산로를 밝혀 주는 '등대'는 빨강 깃발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꽂혀 있는 빨간 깃발에 의지하며 가까스로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긴다.

이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나름대로 뒤돌아서서 숨고르기를 하며 한발 한발 발자국을 옮겨 보지만, 1500고지가 가까워질수록 허허벌판이다. 이때 내 몸을 의지할 겨울나무 하나만 있었으면….

1500고지 진달래밭. 몰아치는 눈보라는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다. 등산로는 이미 눈보라 속에 감춰졌다. 이때 발을 헛디디면 깊은 눈 수렁에 빠지게 된다.

진달래밭 휴게소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쭈그리고 앉아서 컵라면을 먹는 사람, 눈 속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 그리고 산을 정복한 기념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산 사람들은 1500고지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다.

▲ 눈 위에서 싹을 틔우는 새싹처럼
ⓒ2005 김강임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500고지 눈보라는 봄을 잉태하고 있었다. 하얀 눈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털진달래의 봉오리. 그 봉오리를 보는 순간 예쁘다 못해 눈물이 났다. 마치 누군가가 눈밭에 씨앗을 뿌린 것처럼, 아니 흙에서 싹을 틔우는 새싹처럼, 하얀 눈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 1500고지에서 봄을 기다리는 진달래
ⓒ2005 김강임
겨울 속에서 길게 목을 드러내고 꽃망울을 키워가는 끈질긴 생명력. 1500고지 진달래밭에도 삶의 아우성은 요동친다.

▲ 무리를 지어 겨울을 나는 모습이 정겹다.
ⓒ2005 김강임
무리를 지어 함께 겨울을 이겨내는 끈기와 인내, 나는 장갑을 벗고 꽃봉오리에 묻어 있는 눈을 털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아픈 고통을 참고 견뎌왔던가?"라는 생각을 했다.

여행은 늘 나를 다시 깨어나게 만든다. 어느 때는 부족함에 대하여 채찍을 가하기도 하고, 넘치는 부분은 나눔의 지혜를 얻게 하고, 그리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눈을 뜨게 한다. 내가 항상 보고 느끼는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탈출하여 좀더 큰 날갯짓으로 좀더 큰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 같다.

▲ 고드름도 새옷을 입고 있는다.
ⓒ2005 김강임
고드름마저 새 옷을 입고 있는 1500고지의 진달래밭. 7.3km의 겨울 산행은 나를 묵상 속에서 다시 깨어나게 만든다. 1500고지 영주산(한라산의 또 다른 이름)에 봄이 오고 있는 것처럼….
1월 16일 눈보라 속에 다녀온 한라산 기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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