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산, 아들과 함께 정상에 섰습니다

눈을 떴지만 몸을 쉽사리 일으킬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 6시, 조금 더 이불을 끌어올리고 누워버렸습니다. 그리곤 잠깐 감았던 눈을 떴더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아들을 깨우며 아내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합니다. 바쁘게 움직여도 차에 탄 시간은 벌써 아침 8시입니다. 새벽에 일찍 떠나려고 했는데 그동안 각종 송년회에 시달린 몸이 쉽게 말을 듣지 않네요.

혹시나 해서 체인도 챙겼습니다. 저번 주 강원도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남아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집부터 16개나 되는 교차로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영동고속도로에 올랐습니다. 어째 이번 여행은 운이 좋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어디로 갈지 정하고 가는 건 아니지만 혹시 대관령에 들어서면 눈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횡계 나들목으로 빠져나와 옛 대관령고속도로(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람만 매섭게 불어줄 뿐, 눈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옛 대관령 하행 휴게소에 내렸습니다. 이 곳은 언제까지 이런 이름으로 불려야 할까요? 이렇게 버려지게 방치하지 말고 뭔가 시설이 들어서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이곳이 국가소유로 돼 있다는데 너무 방치하는 건 아닌지요?

▲ 영동고속도로 준공기념비 오르는 길
ⓒ2004 방상철
주차장 위로 보이는 영동고속도로 준공기념비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댑니다.

"우리 능경봉에 올라 가볼까? 여기서 1.8km밖에 안되네!"

아내가 능경봉에 오르자는 제안을 합니다. 저는 아들 한번 쳐다보고, 표지판 한번 쳐다보며 잠시 망설이다 "그러자!"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능경봉이 1.8km, 제왕산이 2.7km입니다. 마음이야 대관령박물관 7.6km 방향으로 가고 싶지만 다섯 살 난 아들에겐 너무 큰 무리이기 때문에 제일 가까운 거리인 능경봉을 택했지요.

ⓒ2004 방상철
눈이 왔다면 얼마나 멋있었을까요? 벌써 12월인데 올해는 왜 이리 눈이 안 오는지요.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정말 귓속을 울립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굉장히 시끄러운데 소음은 아니고, 약간 두려운 마음을 일게 하는 소리. 아내는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 같다고 합니다. 혼자 이런 길을 걷는다면 등골이 오싹할 것 같은 소리입니다.

▲ '엄마! 장난감 사주세요.'
ⓒ2004 방상철
조금 걷다보니 돌탑도 보이고 멀리 강릉시내 전경과 그 너머 동해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겨울에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벌거벗은 나무에 눈꽃이 피었다고 상상을 해보니 너무 아름다운 경치가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야! 이거 눈 오면 꼭 다시 와봐야겠는데…!"

ⓒ2004 방상철
능선 길을 따라 약 500m 정도 오르니 비포장도로가 나타납니다. 이어 산불 감시초소도 보입니다. 안에서 사람이 얼굴을 내밀며 저희를 쳐다봅니다.

"야! 꼬마야! 너도 산에 갈려고? 추운데 이 안으로 들어와 불 쬐고 가라!" 아들을 바라보며 강원도 사투리 조금 섞어가며 아저씨가 정겹게 말을 합니다.

"잠깐 들어오세요!"
"아닙니다. 그런데 능경봉에 가려는데 못 가나요?"

입산통제 표시가 눈에 보여 제가 물어봤습니다. 아저씨 말씀이 지금은 능경봉 쪽으론 못 간답니다.

"정 그러시면 제왕산으로 가보세요!"

방향을 가리키는 관리인 아저씨의 눈을 따라 비포장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차량통제를 위해 막아놓은 차단기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왼쪽으로 제왕산 등산로가 보입니다. 이 길은 사람 혼자 걸어가기도 좁은 오솔길입니다.

나뭇가지가 옷깃을 스치며 천천히 가라고 말해줍니다. 사색에 잠기며 걸어가라고 발 밑에 밟히는 낙엽들도 얘기해 줍니다. 밑으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당신들도 천천히 가시오!' 저는 속으로 중얼거려 봅니다.

▲ 혼자 걷기도 좁은 등산로
ⓒ2004 방상철
제왕산은 높이 841m로 대관령 부근에서 강릉 방향으로 내려가는 능선 가운데 잠시 불룩 솟아오른 봉우리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겨울이면 많이 찾아오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길이 쉬워 누구나 접근하기 용이하고, 줄곧 동해를 바라보며 시원하게 뚫린 경치를 선사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아이에게는 어려운 산행인 것 같습니다. 처음엔 재미있다고 씩씩하게 걷던 걸음이 자꾸 뒤로 처지더니, 돌부리에 걸려 몇 번 넘어지곤 했습니다. 그래도 남자라고 엄마보고 자기 손잡고 내려오라며 손을 내줍니다.

"너나 조심해서 내려가렴! 엄마 걱정하지 말고!"

능선 하나를 넘어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다 보니, 어라! 조금 전의 비포장도로를 만나게 됩니다. 조금 허무한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이 비포장길로 내려오면 아무런 경치도 감상할 수 없었기에 잠깐 들었던 허무한 생각은 곧 잊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200m 정도 내려가니 다시 왼쪽 능선으로 제왕산 800m 표지판이 보입니다. 여기는 조금 급경사 길입니다. 아들은 힘들다고 업어달라고 보챕니다. 시간을 보니 대충 1시간 정도 걸었습니다. 어른만의 발걸음이면 30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아이와 함께 오니 배로 더 걸린 거지요.

"아빠가 조금만 업어줄게! 하지만 네가 정상에선 걸어 올라야 해!"

저는 다짐을 받고 아들을 업었습니다. '헉헉' 이내 속옷까지 땀에 젖어버렸습니다. 그동안 무절제하게 보낸 시간들을 정화하듯 땀을 흘리며 입을 꽉 다물고 올라갔습니다. 정상이 눈앞에 보이고 약간의 평지가 나오기에 아들을 내려놓고 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동안 걸어온 길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아들! 저기가 우리가 걸어온 길이야! 봐봐."
"야! 시원하다."

▲ 저희가 걸어온 길입니다.
ⓒ2004 방상철
잠깐 숨을 고른 뒤 아들의 손을 잡고 정상을 향해 올랐습니다. 조금은 위험한 길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아들에게 정상을 포기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봅니다. 바람 때문에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 한동안 숨을 고른 후 다시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아들은 힘들었지만 재밌었다고 합니다.

ⓒ2004 방상철
구 대관령 휴게소로 돌아가는 길은 좀 편한 비포장도로를 택했습니다. 이렇게 잠깐 제왕산에 올랐는데도 2시간을 넘겼지 뭡니까? 차에 돌아와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니 얼었던 몸이 풀리며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올 겨울 꼭 다시 한 번 와야겠습니다. 그때는 아이젠을 착용해야겠습니다. 와서 보니 아무리 쉬운 길이라지만 내리막길은 아이젠 없이는 위험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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