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독립운동가]오의선(吳義善,1889~ 1931)

국가보훈처가 매달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업적 선양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가운데, 올해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용인 원삼면 출신 오의선(吳義善,1889~ 1931)선생이 선정됐다.

오의선은 3대 독립운동가문으로 유명한 오광선과 동향인 죽능리 출신이기도 하다. 그는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고 보성전문학교와 동경 명치대학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그야말로 신·구학문을 두루 익힌 근대지성으로서 1919년 동경 2·8독립선언에 참여하는 한편 상해로 망명,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초기 임시정부의 기틀을 닦는 등 많은 활약을 한 분이다.

특히 활동 후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변신해 항일투쟁을 전개한 점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역사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과 맞물려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본지는 오의선 선생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12월의 독립운동갯지정을 기념해 채영국 국민대 연구교수의 연구논문을 토대로 그의 일생을 엮어본다.

어린 시절과 2.8 독립선언 가담

오의선 선생은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에서 1889년 12월 8일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부친 오인묵(吳寅默)과 모친 구(具)씨 사이의 2남이었다. 어려서부터 가풍에 따라 한학을 배우며 학문과 인격을 닦았다. 남달리 영민한 두뇌와 학습능력을 가진 선생은 10여 세가 되면서 근동에서 신동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청년기, 조국은 이미 일제의 침략으로 국토와 동포가 유린당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일제의 침략에 맞설 훌륭한 신지식을 갖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유일한 살길이라고 판단,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서울로 갔다.

오의선이 진학한 곳은 보성전문학교였다. 민족교육의 강한 정신이 배어있는 이곳에서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을 동지로 규합해 나갔다. 졸업 후 그는 조국의 현실에 직접 뛰어 들어 활동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직 자신의 힘으로는 일제를 물리치고 조국을 해방시키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지식과 힘을 더욱 연마하고 축적시켜야 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들과 상의한 끝에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이를 단행한다.

때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던 1918년. 재일 유학생들은 그해 겨울부터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가면서 항일운동의 방책을 상의하던 끝에 이듬해인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동경 YMCA 강당에서 2·8독립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동경 명치대학생으로서 연락과 독립선언서 배포임무를 맡았던 그는 적극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일경에 검거되지 않았지만, 또 다른 활동의 장을 선택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학업을 포기하고 다른 여러 동지들과 함께 애국지사들이 많이 모여 있는 상해로 건너간 것이다. 당시 와세다 대학 출신인 신익희, 장덕수, 정칙영어학교 출신인 윤보선 등이 그와 함께 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 오의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한 내용을 확인해 주는 문서와 당시 건물 모습. 다만 그를 확인해 주는 사진은 남기질 않아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의 활동

상해에 도착한 오의선은 당대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김구를 비롯해 이동휘·이시영·이동녕·조소앙 등과의 만남은 그를 더욱 조국광복을 위한 과업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이무렵 국내에서는 3·1운동이 폭발했다. 그 물결은 질풍노도처럼 한민족 전체에 퍼져 만주·러시아·미국 할 것 없이 한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의선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4월 경기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됐다.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최초 의원이 된 것이다.

한편으론 직접 국내에서 애국금을 모집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즉 1921년경 그는 북경으로 무대를 옮겨 박용만의 추종자인 김복을 만나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전문가인 박용만은 조국의 독립은 군사적 실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므로 서북간도 및 노령의 모든 무장세력을 하나로 통합, 그 힘으로 일제를 몰아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무장투쟁론자였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오의선이 북경으로 와 박용만의 추종자들과 항일활동을 도모했다는 것은 이 시기 그도 무장투쟁론자로의 변신가능성을 추론하게 하는 대목이다.

오의선과 김복은 북경에 흥화실업은행이라는 금융기관을 만들어 놓고 표면적으로는 이 은행의 주식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냈지만 실은 동지들을 국내로 파견시켜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했다.

국내에서의 활동과 순국

오의선이 어느 시기에 국내로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국내로 들어 온 그는 ‘시대일보’의 기자로 있었다는 점은 밝혀진 사실이다. 1924년 3월 31일 창간된 ‘시대일보’는 최남선이 사장을 맡고, 편집국장에 진학문, 정치부장에 안재홍, 사회부장에 염상섭 등이었다. 이 신문은 이후 동아·조선과 함께 3대 민간지가 됐으며, 신선한 감각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발행 초반부터 심한 경영난으로 결국 1926년 8월 중순까지 발행된 뒤 없어지고 말았다.

오의선은 그곳에서 변절 모습을 보이지 않아 젊은이들에게 민족지도자로 숭앙 받았던 최남선과 안재홍, 염상섭, 홍명희 등과 같은 민족색 짙은 인물들과 함께 독립염원을 동포들에게 알려 독립정신을 일깨우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도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여기저기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고, 또 독립을 열망하는 젊은이들과 조국 독립의 방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과도 교류를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중반 국내에는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사회주의가 퍼져 혈기왕성한 애국청년들이 이를 신봉하고 있던 때였던 만큼 그의 행보는 오히려 당시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감옥에 갇힌 혁명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돕는 국제혁명자후원회의 국내 책임자가 돼 활동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활동을 펼친 오의선에게 일제의 검거망이 미치지 않을 리 없었다. 피신과 만주망명을 하기도 했던 그는 결국 1931년 3월 14일 고향인 용인에서 일본경찰에 피체돼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옥중에서 그는 심한 고문으로 폐결핵과 복막염에 걸려 같은 해 5월 6일, 42살의 한창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2월의 독립운동가 오의선 선생
공훈선양사업 어떻게 열리나

■학술강연회
1)개요
△일 시 : 2004년 12월11일(토) 10:00
△장 소 : 용인문예회관 다목적실 및 회의실
△주 최 : 사단법인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주 관 :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후원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용인시, 용인문화원, 광복회, 3·1운동 기념사업회, 해주오씨 용인 원삼면 대종중회, 용인 향토지킴이 모임, 용인시민신문, 용인신문, KCN
△식전 행사
- 용인의 3.1운동 관련 영상물 상영 (20분)
‘좌전고개에 울린 메아리' - 극본/연출 한원식, 극단 개벽 -
△강연회
- 강사: 채영국 (국민대 사학과 교수)
- 주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오의선 선생 애국 활동

△참여 문의 : 용인시 김량장동 346번지 용인시 문화예술회관 (031-335-0455)


■12월의 독립운동가 기념사진전
△기 간 : 2004. 12. 1 ~ 12. 31
△장 소 : 서대문 역사관, 독립기념관
△주 관 : 광복회(02-780-9662)
독립기념관(041-560-0114)
△내 용 : 오의선 선생의 인물사진과 공적관련 사진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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