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역사인물 발굴]허위 부대원 최 삼 현

▲ 의병 최삼현(1890~1953) 의 유일한 현존 사진. 그는 거의 자신의 행적을 후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근세에 이르러 외침이 있을 때마다 용인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 움직임이 컸던 사실은 사료와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의병봉기 역시 마찬가지다. 원삼면 능원리 출신의 오인수, 양지면 평창리 출신의 임옥여, 모현면 출신의 이익삼 등이 의병대장으로서 맹활약을 했던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수 없이 스러져 간 많은 의병들 중 그 삶의 족적이 확인되고 소개된 적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나마 구술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 최삼현(1890~1953) 의병의 이야기는 민중사적 측면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그에게 힘없고 약한 민족의 운명이 그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는지, 진정 이 나라를 살려 온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말이다.

구전으로 밝혀지는 당시의 활약상

전주 최씨 족보와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의병 최삼현(崔三顯)이 태어난 곳은 충북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잔갈, 일명 ‘흐느실’이라는 마을이다. 1890년 아버지 재천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손 귀한 유력 집안의 5대 독자로 난 그였던 만큼, 많은 관심과 보살핌 속에 유복한 성장기를 거쳤을 것이란 판단은 어렵지 않다.

▲ 제2차 의병투쟁 당시의 의병들의 모습(F.M 매켄지 촬영)으로 「대한제국의 비극」에 게재됐던 사진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의병 활동에 가담하게 됐는지 자세한 경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해방 후에야 절친했던 주위사람 박순종(?~2002) 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우리 의병 대장이 허이(위)대장 이었다”고 증언한 것으로 봐, 그 허위부대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잘 알려진 대로 왕산(旺山) 허위(許蔿, 1885~1908)는 당시 의병의 ‘별’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경북 선산 출신으로 충추원 의관, 평리원 수석 판사를 역임한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의병을 거병해,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1908년 2월 말, 2차 봉기 때는 동대문 밖 30리 까지 진군했으나 일본군에 쫓겨 퇴각하고, 경기 연천군 반석동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피체, 10월 21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동대문 밖 ‘왕산로’는 바로 허위 선생의 호를 붙인 것이기도 하다.

▲ 의병 최삼현이 속했던 허위 의병부대장의 사진. 허위(許蔿,1885~1908)는 당시 민족의 영웅으로 불릴 만큼 의병의 별이었다.
일본 헌병에 쫓겨 빈 독속 다섯달

여하튼 왜이(倭夷) 축멸을 강령 중 하나로 선포하고 항쟁했던 동학혁명이 1894년 실패에 이어, 2대 교주 최시형이 1898년 후기 북접(北接) 10만 병력을 이끌고 싸웠던 곳이 고향 인근인 공주였던 점, 이후 의병 봉기 역시 충청권을 휩쓸었던 점을 감안하면 최삼현의 의병 참여는 어쩜 나라를 걱정하는 열혈 청년으로써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나이로 추정해 최삼현이 허위 의병부대에 가담한 것은 허위의 2차 봉기 때로 추정된다. 허위는 1907년 7월 24일의 정미 7조약(차관정치 시작, 군대 해산 밀약)과 7월 31일의 한국군 해산에 통분을 이기지 못해 의병 6,600여명을 이끌고 경기도 양주에 집결했다. 경상도의 신석돌(申乭石) 등 전국에 이름을 날리던 의병대장들이 망라된 1만여 명이 넘는 부대와 함께 13도 의병대를 조직해 포천, 연천, 양주 등 경기북부에서 일본군 방위망을 뚫고 서울로 진격했다. 그가 1908년 체포돼 교수대에서 순국하기 까지 경기도를 돌면서 계속적인 의병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최현삼은 경기 의병 대열에 함께 했고 1909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위세가 약화돼 뿔뿔이 흩어진 무리 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행적이 다시 확인되는 것은 고향에서다. 일본 헌병에 쫓긴 그는 음성 고향마을에 숨어들었지만 엄혹한 시대 상황에서 절대 남의 눈에 뛸 수가 없었다. “일본군에 쫓겨 우리 집에 오셨어. 어떻게 해. 광 안에 빈 독을 엎어놓고 그 속에 숨겨 드렸지. 거기서 무려 다섯 달이나 사셨는데, ‘의병을 숨겨주다 들키면 징역 가니 더 이상 피해를 줄 수 없다’며 어디론가 사라지셨지.” 박순종씨의 생전 회고다.

그 후 최삼현이 몇 해에 걸친 오랜 도피생활 끝에 동료 2인과 함께 마지막으로 숨어 든 곳은 바로 용인이었다. 좌전고개 인근에 있는 양지면 도창말에서 이천시 마장면 해월리 기네미를 거쳐 백암면 가창리 두평이란 마을에 한 밤중에 나타난 것이다. 당시 의병 항쟁은 중단됐지만 서슬 퍼런 일제 치하였던 관계로 머슴으로 신분 위장을 했다. 각기 세 사람은 인근 동리 부잣집으로 흩어진 것이다. 그는 가창리 학자골에 안씨댁이 부자라는 소리를 듣고 그 곳에 위탁했다. 밥만 먹여주는 조건으로 농사일을 한 것이다. 열심히 숨어 일하길 수년. 어느 덧 나이는 2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그의 과거 행적은 몰랐어도 마침 한 마을에서 성실한 그의 모습을 유심히 보아왔던 이웃에 의해 14세의 처녀와 데릴사위로 결혼을 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부인은 어린 14세 상산(商山) 김씨였다.

▲ 아버지 최삼현의 묘지 앞에 선 셋째아들 최완영씨. 최씨는 기록상 전해지지 않는 의병들의 명예회복과 국가 유공자 지정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왜놈들…너희들도 알아야 한다”

넉넉한 집안의 5대 독자 최삼현. 결혼 후 5남2녀를 두고, 대부분 의병들이 그러하듯 돌산(乭山) 또는 현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그는 해방 될 때까지 과거 행적을 일체 감추었다. 해방 이 된 후에도 수십년 응어리 진 가슴 속 얘기를 꺼내는 것은 8.15 해방절이나 국치일 등 특별한 날 뿐이었다.

“ ‘왜놈들은 죽일 놈이다. 너희들도 알아야 한다’그 정도셨지요.” 오히려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과거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했던 것은 어머니와 주위 어른들이었다. “음식투정을 하는 자식들에게 어머니가 ‘너희 아버지는 나라를 구하려고 4,5년간 찬밥도 못 먹고 밤잠도 못 주무시면서 고생하셨는데…’라고 하셨지요.”

한 번은 어린 초등학교 시절 하교 길에 한 친구가 “의병은 먹을 것이 없어 굶기도 하고, 남의 밥을 훔쳐 먹기도 했다고 선생님이 그러더라”는 말에 풀이 죽고 섭섭하던 차에 지나가던 어른이 그 얘기를 듣고 아버지 이름을 거명하며 “그 분은 옛날에 일본과 싸웠던 의병이셨고, 대단한 애국자였다”며 “너희들이 더 커서 공부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다”고 말해 큰 격려가 됐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는 세째 아들 최완영(64)씨다.

이름도 명예도 없이 역사의 밀알이 되어 묻힌 최삼현. 그가 더 세상에서나마 갈구하는 것은 무얼까. 때마침 과거 친일행적을 규명해 역사를 바르게 세우자고 하는 것조차 정쟁의 대상이 되고 번번히 좌절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과거를 애써 숨기는 것처럼, 의병에 나섰던 최삼현 선생 역시 평생 자신의 행적을 제대로 후손에 알리지 않고 가슴속에 묻은 채 세상을 등졌다. 오늘날 이러한 현실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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