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덕의역사속으로

오늘날 인구조사는 매년 지방자치단체에서 실시하며, 5년마다 통계청에서 인구주택센서스를 통해 하고 있다. 옛날에는 세금을 거두고 부역과 군역을 부과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엄격히 했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호구 조사를 엄하게 했다. 중앙 집권적 봉건 국가 체제를 구축해 나가면서 호구 조사 제도를 확립해 이를 위반한 자는 엄격히 제재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그러나 3년마다 호적 편성을 정비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인구수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조선의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개성의 인구가 13만 호라고 했다. 이를 근거로 하면 대략 100만 명 정도가 된다. 조선시대에 백만 명이 살았다는 것은 고려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추측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대체적인 전국민의 숫자는 대략 700만∼800만 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호적 제도가 정비되고 호구 조사도 여러 번 실시하여 전 국토에 걸쳐 인구수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시대 각 도별 또는 각 관별로 작성된 호구 자료나 역대 왕조 실록의 호구수에 관한 기록들을 통해서 계산해 본 조선 5백 년 동안의 인구수는 아래의 표와 같다.

조선시대에도 그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군역과 부역을 부과하기 위해서 호구 조사를 실시했다. 따라서 인구 총수를 조사한 것이 아니라 군역과 부역을 할 수 있는 열다섯부터 육십 세 사이의 남자를 조사하는 ‘남정 조사(男丁調査)’가 많았다. 이 사실은 세종 때의 인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인구가 다른 때보다 현저히 적은데, 이는 남정(男丁)을 조사했기 때문이다.

중종보다 100여년 후인 인조(재위:1623∼1649) 때의 인구가 더 적은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차례의 병란으로 호적이 불에 타거나 없어졌으며, 인구의 통계 기준도 달라졌기 때문인 것이다.

현종(재위:1659∼1674) 때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호적 정리와 통계 체제의 개선이 가져온 결과다.

광무 10년(1906)의 조사는 일본인이 실시한 것으로 비교적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인구 증가율이 연평균 0.23퍼센트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당시 세계 인구 증가율에 비하면 너무 높은 수치이다. 삼국시대의 인구 증가율인 0.05퍼센트로 계산하면 실제 통계 수치와 차이가 나지만, 조선을 처음 연 시기엔 990만 명 정도, 1543년에는 1070만 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출산율의 감소는 인구의 감소로 이어지며, 인구가 줄면 노령화 사회가 되면서 많은 사회 복지 비용이 증가하고 산업의 공동화 현상이 따를 것이다. 나라에서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뒷받침을 해야만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민병덕(용동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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