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고장, 김제를 추억하다

오마이뉴스 서부원(ernesto) 기자
우리 나라에서 지평선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 김제 땅이라고 했습니다. 해마다 낱알이 누렇게 익어 장관을 이루는 10월 초순이면 지평선 축제가 열립니다. 우리 나라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수많은 지역 축제를 열고 있지만, '지평선'이라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파는(?) 축제는 이곳 김제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인 벽골제의 수문 흔적
ⓒ2004 서부원
아무튼 다가오는 10월 초, 지금으로부터 대략 1700년 전에 축조됐다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저수지로 알려진 벽골제 주변에서 가을의 푸르른 하늘과 맞닿은 광활한 황금빛 들판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겁니다.

호남 평야의 한복판인 김제 땅은 과거 서울로 올려보내는 세미(稅米)가 가장 많았던 곡창 중의 곡창이니 벽골제의 존재 자체는 너무도 당연해 보입니다. 지금은 서편 둑과 수문으로 쓰였던 흔적 몇 군데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오로지 이 저수지에 기대어 목을 축였을 너른 들판은 역시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 주는 이 고장의 상징입니다.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있는 저수지 둑 주변으로 벽골제 전시관과 볏짚 공예품을 전시한 야외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 축조될 당시의 애틋한 전설을 말해 주는 단야각과 함께 수차, 용두레 같은 벼농사에 관련된 체험 시설과 그네와 널뛰기 등의 전통 민속놀이를 위한 공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모습입니다. 벽골제는 고대 우리 나라의 농경 문화를 보여 주는 역사 유적이라기보다는 체험 활동을 곁들일 수 있는 종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 벽골제 건너편 폐교를 활용해 개관한 조정래 아리랑문학관
ⓒ2004 서부원
벽골제로 들어서는 입구 맞은 편 지평선을 가리는 자리에 '아리랑문학관'이 새뜻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폐교된 초등학교 터에 자리 잡은 이곳에는 작가 조정래 선생이 소설 <아리랑>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사용했던 원고지, 취재 노트와 필기구는 물론 모자, 등산화, 여권 등이 가지런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인 박물관에서 느끼지 못했던 다양함과 신선함이 담긴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이웃해 있는 벽골제에 들러 황금빛 들판의 지평선이 안겨 주는 풍요로움을 가슴에 담았다면, 이곳에서는 지금으로부터 한세기 전 무능한 조정과 일제의 수탈로 인해 처절한 삶을 살아가야 했던 민초들의 한(恨)을 되새기며 숙연해집니다.

곡창이었기에 일제에 의한 수탈의 마수가 가장 먼저 뻗쳐 농토 대부분을 그들에게 빼앗겼으며, 이곳에 뿌리박고 살아 왔던 수많은 김제의 백성들은 고향을 등진 채 만주로, 연해주로 떠나야 했던 뼈아픈 역사를 소설의 흔적을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리랑문학관은 벽골제와 황금빛 들판이 주는 풍요로움에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김제 땅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게 바라보고 느끼게 해줍니다. 벽골제를 찾아 왔다면 이곳을 빠뜨리고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 어렵사리 김제 땅을 찾아 왔다면, 지평선만 누리고 가기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황금빛 지평선에는 서산의 해가 걸린 아득한 수평선이 제격입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곳이 김제의 서쪽 끝에 매달린 망해사입니다.

▲ 망해사에서 내려다 본 새만금 갯벌
ⓒ2004 서부원
김제 시내의 우회도로를 지나 망해사에 이르는 길은 수킬로미터 동안 단 한 번의 굴곡도 없는 직선 도로입니다. 도로 주변은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뒤로 시야가 아득할 만큼 넓은 들판뿐입니다. 이름하여 '광활면'입니다. 직선 도로가 끝날 즈음에 외딴 마을 하나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고, 횟집촌으로 유명한 심포항 입구를 지나 바로 왼편으로 난 숲길을 조금 오르면 군더더기 없는 서해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 언저리에 조그만 군부대와 이웃하여 망해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 망해사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호남 평야
ⓒ2004 서부원
바다에 면한 벼랑에 매달려 제법 운치 있는 절집이지만, 얼마 안 있어 바다를 그리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인해 푸른 서해 바다와 드넓은 갯벌이 만나는 이곳이 곧 매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리 되면 저 멀리 건너편으로 보이는 군산과 옥구 들녘에 이르는 길이 뚫릴 것이고, 얼마 전 뉴스 기사처럼 세계 최대의 골프장이 바로 이곳 망해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갯벌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다가 바라 보이는 '망해사(望海寺)'에서 바다를 잊어야 하는 '망해사(忘海寺)'가 될 운명인 셈입니다.

이웃해 있는 군부대도, 산등성이 너머 심포항 횟집촌도 망해사처럼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매립이 끝나면 군부대는 해안 경계의 임무를 찾아, 횟집촌은 막막해질 생계를 걱정하며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터이니 말입니다.

▲ 망해사 아래 갯벌에서 일하고 있는 어부. 그들의 모습도 곧 사라지려나?
ⓒ2004 서부원
망해사 뒤편 전망대에 올라 주위를 둘러 보는 맛은 일품입니다. 갯벌을 감싸 안은 서해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뒤쪽을 보면 초록빛과 황금빛이 어울린 가을 들녘의 장관이 펼쳐집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더해져 가슴마저 트이게 해 줍니다. 얼마 안 있어 사라질 풍경이어서 그런지 더욱 멋지게 보입니다.

이 가을, 김제 땅에 너른 들판의 지평선을 보러 갈 요량이라면, 호남평야의 한 복판이라 볼거리도 먹거리도 모두 차고 넘치지만 망해사만큼은 꼭 들러보시길 권합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보게될 현재의 모습이 추억으로 남을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4/09/21 오후 10:51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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