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태풍이 지나간 자리

오마이뉴스 김민수(dach) 기자
▲ 종달리 해안가에서 바라본 우도의 아침(오전 6시 10분경)
ⓒ2004 김민수
태풍이 지나간 후 맞이한 새벽 하늘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겨울 하늘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맑은 별들과 달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죠. 계절마다 별은 다르게 빛나는데 오늘 새벽은 유난히도 맑게 빛났습니다.

'자연도 시련을 겪고 나서 더 아름다운 법이구나'하고 생각하니 우리 삶에 찾아 오는 고난에도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고 나니 태풍이 지난 후의 바다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습니다.

우도가 보이는 종달리 해안가에 섰을 때 파도에 밀려온 미역을 줍는 할망을 만났습니다. 이틀 동안 제법 높은 파도가 치더니 평소보다 많은 미역을 해안가에 토해 놓았습니다.

"할머니, 뭐 하세요?"

쑥스러운 듯 자리를 피하시는 할망을 보니 괜시리 부담을 주었나 싶어 편하게 일하시라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우도에 숨어있던 해가 그 위용을 드러냅니다. 언제 태풍이 있었느냐는 듯 잔잔한 바다, 평온한 섬 우도는 그렇게 또 하루를 열어가고 있었습니다.

태풍으로 한 사나흘 성산포로 나오지 못했던 아이들도 오늘은 도항선을 타고 재잘거리며 친구들과 학원을 나오겠군요.

▲ 종달리 두문포구의 등대
ⓒ2004 김민수
지난 해 태풍 '매미'로 소실되었던 두문포구에 있는 방파제와 등대는 제법 튼튼하게 보수공사를 했는지 이번 태풍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방파제가 그 거센 파도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었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원래 '방파제'로 만들어져 그저 묵묵히 그 역할을 할 뿐인데 뭐가 고맙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많은 이 시대에는 그 당연한 일조차도 고마울 뿐입니다.

평온했습니다. 태풍이 없었다면 이 잔잔한 바다에 대한 고마움도 몰랐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태풍이 없었다면 저 바다 심연에 고여 썩는 것들이 온 바다를 삼켜 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태풍이 와서 온 바다를 뒤집어 놓으면 비록 아픔이 생겨나지만 그 안에 새 생명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태풍도 고맙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그 상황에는 "왜?"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고난이 지난 후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 고난으로 인해 더 성숙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오히려 감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다 여기로 밀려왔을까?
ⓒ2004 김민수
어느 곳에서 태어나 어느 곳을 여행하다 빈 껍데기만 남아 이렇게 이곳에 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태풍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중년의 남자의 눈에 띄여, 손에 들리워질 줄 누가 알았을까요?

필연과 우연. 어떤 만남이든지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면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저 그렇게 살다가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만나고 느끼고, 만지고, 보는 것들이 삶에 각별한 의미를 더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만남인들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때로 우리들은 필연의 만남인데도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쳐 버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소중한 것도 그냥 지나쳐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니듯이 내가 만나는 것들을 그냥 일상으로 보내 버리면 우리의 삶도 그냥 일상적일 뿐입니다.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쩌면 정말 특별한 것을 만나서가 아니라 모든 만남을 각별한 마음으로 다가서기 때문입니다.

▲ 환삼덩굴의 이파리
ⓒ2004 김민수
바다가 그리워 해안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환삼덩굴도 바람과 파도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바닷물과 해풍에 시달린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바싹 타들어 가는 이파리, 감싸고 있던 다른 식물의 이파리도 꺾여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부여안고 그는 또 새순을 낼 것입니다. 자연은 늘 그래왔습니다. 상처가 있다고 단 한번도 절망하지 않았고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상처가 있으면 있는 대로, 잘려나가면 잘려나간 대로, 뽑히면 뽑힌 대로 그저 묵묵히 흙과 바람과 햇살이 있으면 그렇게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피어났습니다.

▲ 순비기나무의 이파리
ⓒ2004 김민수
새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는 자연을 통해서 태풍의 위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봅니다.

'저렇게 다 말라 가도록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구나. 자신의 온몸을 새까맣게 태워 버린 파도를 그렇게 사랑하기에 바다 가까운 곳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구나. 그리고 너의 마름으로 너의 전 존재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그냥 그렇게 마지막 순간도 꼿꼿할 수 있는 것이구나. 태풍이 지난 후 피어나는 너의 다른 모습들을 보면서 그렇게 바스락거리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구나.'

아직은 여명의 아침. 바람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입니다. 바람이 잠에서 깨어나면 또다시 이들을 흔들겠지요. 그러나 그 자리에 그들은 그렇게 서있겠지요.

▲ 새싹들의 힘
ⓒ2004 김민수
태풍이 오기 전 날 다시 씨앗을 뿌렸습니다. 올 해 제주도의 날씨는 변덕 그 자체여서 덥고 마른 바람이 불어와 각종 씨앗들을 말려 버리더니, 폭우로 싹을 냈던 것들을 짓무르게 하니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김장 배추를 심고 이틀 만에 싹이 나와 "아이구, 좋아라!"하며 솎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밭이라 이런 저런 벌레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에 어떤 벌레들이 배추와 무의 싹을 댕강댕강 잘라 버려서 다시 씨앗을 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커다란 나무도 꺾어 버리는 거센 바람이자만 땅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는 그 작은 씨앗들을 어찌할 수는 없었겠지요. 세차게 불어 오는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당히 내리는 비에 온몸을 적신 씨앗은 태풍이 지나가자마자 기지개를 켜면서 새싹들을 토해 냅니다.

'아, 이것이 희망이다.'

작은 것들이 왜 아름다운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어떠한 것인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품고 있는 생명으로 풍성한 결실을 꿈꾸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태풍. 그것이 지나고 나니 평온하게 맞이하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습니다.
2004/09/08 오전 8:58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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