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후예 김주기 용인 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

▲ 독립유공자의 후예로서 고단하게 살아온 김주기씨. 그는 지금껏 선대를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없었던 사회 현실이 무엇보다 절망스러웠다고 말한다.
최근 들어 유력정치인들의 선친 관련 친일경력 파문과 공방은 한 마디로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현대사의 자화상이자 압축판이란 지적이 높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누대에 걸쳐 용인에 거주하는 한 독립유공자 후손의 삶과 그 가족사를 통해 잊혀져 가는 독립유공자들을 생각해 보고, 나아가 일제청산과 굴절로 얼룩진 역사 바로세우기의 당위성을 확인해 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편집자 designtimesp=24962>

민간단체인 ‘용인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가 용인문화원 강당을 빌려 주최한 8·15기념식장. 조촐하다 못해 쓸쓸함마저 느껴지는 행사장 앞줄엔 언제나처럼 그가 앉아 있었다. 김주기씨(64)다.

몇 해 전 사고로 거동이 불편해 바깥 출입을 꺼리지만, 그런 그에게도 예외가 있다면 3·1절이나 광복절처럼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리는 행사가 있는 날이다. 혼자만이 아니다. 올해 3·1절 기념 학술대회 때는 여섯 명의 자녀는 물론 손자 손녀까지 대가족을 데리고 나왔다.

“누구로부터 권유를 받은 적도 없었어요. 다만 할아버지 삶의 행적을 안 뒤로는 새로운 눈으로 우리 민족이 걸어온 고난의 길을 뒤돌아보게 됐죠.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라고도 생각합니다.”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이사로서 늘 든든한 후원자이자 버팀목인 김주기씨는 독립유공자 김구식(1881~1941)의 손자다.

그의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왜곡과 굴절의 현대사가 보이고, 잊혀져 가는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의 삶의 단면이 들여다보인다.

▲ 김주기씨의 단란한 가족 모습.
가세 기울고 얘기하기 조차 꺼려

독립운동가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오석 김혁(1875~1936)장군과 함께 기흥일대 명문가 경주 김씨 갈천공파 후예인 김구식. 그는 1919년 3월 30일 하갈리 개울번던(현 ‘수원 나들목’ 부근)에서 주민들을 모아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한 장본인이다. 읍삼면 읍내(현 구성읍 언남리)까지 진출했던 김구식은 용인 헌병대의 총격을 받자, 피신해 있던 중 결국 왜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물론 그에겐 모진 고문이 뒤따랐고,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아 만기복역 끝에 출소했지만 이미 몸은 망가진 상태였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있듯이 신병치료를 위해 많은 가산을 탕진해 가세마저 기울었다.

“해외독립운동에 가담해 아예 집안 살림을 돌볼 수 없었던 분들에 비하면 우리 집안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죠. 건강을 회복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밤낮없이 땀을 흘려 잃었던 농토를 얼마간 회복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김주기씨는 한때 기울었던 가세 못지않은 안타까움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랑스러워야 할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을 아버지조차 얘기하길 꺼려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직접 듣지 못한 섭섭함보단 그 이유가 더욱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고 말한다.

이유가 있었다. 일제 때는 감시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해방 전에는 적은 경찰력을 보완하는 조선인 밀정들이 곳곳에 있었답니다. 그것도 잘 알고 지내는 마을 주민들을 활용했으니, 동네사람끼리 갈등하고 싸우기가 싫었던 거지요.”

그러나 해방이 되고 나서도 할아버지의 경력을 드러내길 꺼렸던 이유에는 그 자신 기가 막혔다 한다. “일본 치하에서 면서기라도 한 사람들은 그 후 면장도 하고, 승승장구했다는 거 아닙니까. 심지어는 고등계 경찰간부 출신이 해방 후에 경기도지사까지 하는 세상에, 독립운동 경력이 피해가 되면 됐지 이득이 될 게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사실이 그랬다. 가족 내력을 잘 알지도, 알 수도 없었던 김주기는 고향인 기흥에서 신갈초교와 수원북중, 그리고 수원농고를 졸업하고 줄곧 농사를 지으며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 3·1만세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 김구식의 조선총독부 재판 기록
그러다가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경력을 적극 찾아나선 것은 고 박용익 선생을 만나면서부터다. 조선총독부 재판기록을 통해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 가지고 있었던 박용익은 김주기를 만나 자료를 건네줬다. 그 결과로 1990년 광복절에 국가로부터 할아버지 김구식은 독립유공자로서 ‘애족장’훈장을 수여받았다. “연금혜텍이 있는 줄도 몰라 뒤늦게야 신청을 했지만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경력을 확인한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라는 김주기씨.

좌전고개 성역화사업에 희망

요즘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잔재 청산 차원에서 추진 중인 친일진상 규명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이미 늦었다고 아쉬워한다. “해방 60여년이 된 만큼 친일을 했단 사람들의 후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미 우리 사회 각계 지도층으로 자리잡고 있어요. 지금 와서 과거 조상들의 행적을 캐는 것에 대해 쉽사리 동의하겠어요? 설령 한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사회갈등도 커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피해자 가족이었던 그는 오히려 사회갈등을 걱정하며 용서하길 바라고 있었다.

십 수대에 걸쳐 용인을 지키고 있는 그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마지막 소망을 가지고 있다. “원삼면 좌전고개에 할아버지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3.1운동 성역화사업이 제대로 완성되는 것을 보는 것이죠. 그리고 자라나는 후세들이 그곳을 찾을 때, 한번만 이라도 그들 앞에 나서서 계승해야 할 독립운동 정신을 심어주고 싶다”고 강조한다. 그리고는 소박한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덧붙인다. “기력이 남아있는 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사업이나 행사에는 꼭 참석해야죠. 그거라도 해야…” 그의 말끝은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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