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세상사, 모두 잊어 버리고 산속을 거닐었습니다

오마이뉴스 김규환(kgh17) 기자
▲ 알알이 영글어 가는 다래 열매에 물방울
ⓒ2004 김규환
비 오는 날 산으로 가련다. 축축하기보다 시원한 청량 음료 맛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먼지 한점 없는 연무를 마시는 기분이 썩 좋으리라. 산길을 걸으며 침엽수에서 맘껏 발산하는 피톤치드로 목욕하면 정신이 맑아지겠지.

준비물은 필요 없다. 훌훌 털고 집을 나서자. 최대한 가볍게 가장 가까운 아무 산으로 들면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어젯밤과 내 주위에 요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시 되짚어 보자. 그래 벌써 1년의 절반을 살았구나. 크고 작은 일이 무척 많이 일어났다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잊혀져 간다.

▲ 연잎도 토란잎과 같이 물이 엉겨붙지 않아 쓰고 다녀도 좋겠습니다.
ⓒ2004 김규환
갑신년 첫날 새벽 두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며 활기차게 시작했던 한 해다. 그 아이들에게 난 ‘이천사’라고 불렀다. 곧 바로 대통령이 탄핵되고 촛불 시위로 타올랐다. 이어 총선 정국으로 이어졌다. 개혁을 부르짖던 여당이 원내 과반을 넘겼다. 내가 지지했던 진보 정당도 당당히 국회로 진출하였다. 다시 대통령이 복귀하여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 과정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인 줄 알았고 아무 이상 없이 안정을 구가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상생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민생은 추락하는데 헐뜯는 행위는 그 끝이 없다. 연이어 우린 추악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에 동포를 보내 놓고 '파병원칙재확인'이라는 카드만 고집하다가 그를 잃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이내 그 사실도 역사책에 사건 사고로 처리되어 나올 가능성이 짙다.

▲ 연꽃
ⓒ2004 김규환
행정수도를 옮겨도 좋다. 천도를 해도 반대하지 않겠다. 다만 반대하는 사람들 숫자가 늘자 이젠 정부 여당과 청와대가 총동원되어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마저 제2의 탄핵을 주장하는 정적으로 몰아세우는 현 정국을 풀어가는 대통령과 그 주위의 사람들이 걱정이다. 나는 사실 행정수도 이전이나 천도의 대의에 찬동을 한 것이지 그들이 지금 막가파식으로 몰아붙이는 것까지 용인한 적은 없다.

개혁을 하되 바퀴소리까지 요란할 일은 아니다. 오른쪽 바퀴더러 “너, 왜 나와 똑 같지 않느냐?” 며 몰아붙이는 것은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치사한 행위다. 나란히 가지만 엄연히 족적은 다르질 않던가. 우리가 보면 똑같은 것을 “너 자꾸 그러면 그 바퀴 빼버릴 거야!”라며 으름장 놓는 모습은 없었으면 좋겠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게 마련이지만 언제까지 발목잡지 말라고 할 것인가.

▲ 정화된 마음
ⓒ2004 김규환
미국의 의도 헤아리는 것도 좋다. 그러나 답은 늘 가까이 있다. 국민의 마음에 구하려는 답이 다 들어 있다. 이젠 제발 국민 눈치를 최우선으로 보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반세기 이상을 외세에 질질 끌려 다녔으면 이제 그 긴 터널에서 빠져나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과 같은 암울함을 또 물려주고 말 것인가.

보름 전부터 버스까지 서민들의 발목을 확실히 잡아 준다. 서울 시민으로 산다는 건 웬만한 인내심 없으면 단 하루도 살기 힘들다. ‘이 편한 세상’이 아니다. ‘이 뻔한 세상’에서 국민으로, 시민으로, 주민으로 살기 왜 이리 힘겨운가.

▲ 연못이 연으로 꽉 찼습니다.
ⓒ2004 김규환
걱정도 병이다. 다정(多情)도 병이다. 적당히 끊고 맺을 줄 아는 게 화를 자초할 일이 없을 테고, 때가 되면 분위기 반전도 필요하다. 상대를 추켜세울 줄 아는 넓은 아량을 가진 폭넓은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아랫도리는 풀잎이 머금고 있는 물기에 축축이 젖었다. 곧 어깨를 타고 내린 물이 아래로 흘러 온몸이 비에 젖는다. 온갖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흐느적흐느적 내 마음이 갈피를 못 잡던 나날이다. 벌써 장마에 태풍도 두 번이나 다녀갔다. 그래도 이 정도니 다행인가?

▲ 낙엽송 길을 걷는 기분-우산이 있어도 시골 산길에서 비를 맞는 즐거움도 꽤 좋습니다.
ⓒ2004 김규환
잠시 뒤 나뭇잎에 간신히 걸려 있는 비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후두둑 떨어졌다. 그만하란다. 큰 물방울 하나가 내 잠자던 뇌를 살아 꿈틀거리게 한다. 소용없는 걱정 그만하라는 지시인가?

산에 간다고 반드시 높은 산을 오를 것까지는 없다. 꼭대기를 찍고 오면 좋겠지만 옷이 무거워지면 그냥 오르다 발걸음을 되돌려도 좋다. 사람들이 한번도 다니지 않았던 산으로 들어가 장맛비 맞아 보드라워진 뽕잎을 한 줌 따서 주머니에 넣고 내려오리라. 쌈을 싸 먹을까 보다.

▲ 산에서 만난 두꺼비
ⓒ2004 김규환
우리가 지나간 길은 산림도로였다. 임도라 사람 한 명 찾기 힘들다. 풀만 밟고 올랐다. 같이 갔던 셋이 도란도란 어릴 적 추억을 더듬으며 나무와 풀과 꽃과 나비를 얘기했다. 마음에 허기가 몰려왔다. 한산하다. 자욱이 앞을 가리고 있는 구름 사이로 소나무, 잣나무, 낙엽송, 전나무 숲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쭉쭉 뻗은 나무는 조림지라 40여 풍상을 겪으며 어느새 숲의 주인이 되어있다. 이 상쾌함 오래 남으면 좋으련만. 두꺼비를 봤으니 복을 받을까?

산을 내려오자 절간이 하나 보였다. 어김없이 연꽃은 만발했다. 붉거나 희고 노랗다. 함께 어울려 보았다. 향이 배고 눈이 트이고 귀가 열린다. 아마 저 연꽃이 없었던들 그곳은 맑지도 않았으리라. 정화(淨化) 솜씨 빼어난 못의 연화(蓮花)는 처음엔 척박하고 더러운 연못 소굴에 있었다. 오늘은 어찌 이다지 제 할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걸까.

▲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다. 처마에서 무럭무럭 자라 배불리 먹고 내년에 또 오려므나.
ⓒ2004 김규환
다시 어느 시골집에 가서 25년이라는 긴 세월에 묻혀 있던 제비 새끼를 보았다. 입이 찢어져라 벌리면 자근자근 씹어 물고 온 먹이를 잘도 넣어주는 어미와 아비 그리고 귀염둥이들…. 그래 너희들도 그렇게 사는구나.

시원한 물줄기를 보니 온갖 먼지와 추잡함이 다 떠내려가 세상사는 맛이 난다. 그곳에 발을 담갔다. 간만에 다녀온 그 길에서 세파를 잠시 물릴 수 있어 행복했다. 남자 셋은 무척 즐거웠다.

▲ 비 맞은 원추리꽃
ⓒ2004 김규환
▲ 계곡물이 불었습니다. 발을 담그니 머리가 지끈거리게 시원합니다.
ⓒ2004 김규환
비오는 날 축구하는 것도 재밌지만 가까운 산에 다녀오는 것도 좋습니다.

2004/07/15 오후 5:23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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