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鄕史 朴鏞益선생의 영전에 바칩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마음껏 새 잎과 꽃을 피우는 5월입니다. 가녀린 빗줄기에 떨어진 꽃처럼 그렇게 가시다니요. 이제 당신의 논에 모를 심을 차례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가셔야만 했습니까? 며칠간의 병상에서도 당신의 눈빛은 강렬했습니다. 누구도 삼년 간이나 투쟁해온 병마와의 싸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강했던 분이십니다. 오늘 당신의 영전에 조사(弔辭)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당신 주변에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마는 저와는 각별한 인연이었습니다. 당신과는 30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습니다. 탁본을 한답시고 용인지역의 산들을 헤매고 다니던 때는 20대였던 제가 지금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입니다. 그토록 적지 않은 세월 속에서도 당신은 한 번도 저를 떼어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께서 일을 벌려놓으면, 전 뒷마무리에 바빴습니다. 결국 성과물은 제가 독차지하고, 당신은 뒷전에 서서 계셨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부끄럽고,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모두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눌한 언변에, 고작 내뱉으신 말씀은 “미안합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두 말뿐이었습니다.

향사 선생이시여, 어느 해였던가요. 바로 지금과 같은 모내기철이었습니다. 그땐 가물었습니다. 양수기로 밤새워 물을 퍼 올린 다음 모를 심어야 했던 때입니다. 그때 당신은 저와 함께 탁본을 나섰습니다. 식구들의 눈총도 아랑곳 않고 말입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당신의 집 앞을 방문하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이제야 마음을 놓고 댁에서 뵈올 수 있게 되었는데, 오늘 이 일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제는 누구와 저 산들을 찾아 나설 것입니까? 이제는 누가 용인을 찾는 이방인을 안내할 것입니까?

향사 선생이시여, 정말 대단하십니다. 당신께서는 1950년대에 명문대를 졸업하신, 촉망받던 인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평생동안 취업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사업을 이뤄 축재를 추구한 바도 없으십니다. 그야말로 조선조의 선비이십니다. 당신이 일궈오신 것은 오직 향토사뿐입니다. 당신께서 불초한 제게 아호(雅號)를 청했습니다. 저는 주저 없이 향토사(鄕土史)에서 ‘土’ 빼고 ‘鄕史’가 어떠냐고 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정말 만족스런 아호라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렇게 지어진 아호를 지금 영전에 바치는 조사에서 처음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향사 선생이시여, 잊으셨나요?

좌전고개에 항일독립기념관을 세우고 한껏 대한독립만세를 불러보자던 약속을 잊으셨나요. 올 여름엔 허균 묘소 앞에 용인시민이 지켜야 할 문화유산 제2호의 푯말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접으셨나요. 평생 모은 향토자료를 책자로 엮겠다던 다짐은 버리셨나요. 당신은 아직도 일만 벌려놓고 마는군요. 이제는 우리들도 이력이 났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이 항상 곁에 있으리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향사 선생이시여 보고 계십니까?

병상에서 지난주에 제게 써주시던 글이 무슨 뜻이었습니까? “일어나 예리해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당신을 일러 “끊고 매듭지음이 없는 분”이라고 평했습니다. 항상 그랬잖습니까? 이제와 생각하니 당신의 그런 처세는 주변에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도 머물게 하는 고도의 방편이었습니다. 병상에서 일어나 예리한 판단을 일깨워주신다던 그 말씀은 또한 무슨 뜻이십니까? 언젠가는 당신의 그 말씀을 이해하겠지만, 지금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향사 선생이시여.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30년 동안 답사를 다녔으니 두 다리 펴고 쉬어도, 게으름을 탓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일궈놓으신 터전에 머지않아 꽃이 필 것입니다. 이제는 선영의 복지에 영면하시고 평안하소서.

홍순석/ 강남대 교수·용인향토문화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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