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각스님

까치설날에 입었던 설빔인 한복이 다시 옷장으로 들어갔다. 한복은 거의 1년에 두세 번 정도 차려입는 옷으로 변한 지 오래다. 아니면 고궁 갈 때 약간의 이득을 보려고, 또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입는 옷 정도로 변모하고 말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설빔은 설날에 처음으로 입는 옷이었다. 비록 예쁜 한복이라 하더라도 두툼한 겨울옷과 양말이 아이들의 설빔이었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말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할 테지만, 그땐 새 옷 입은 들뜬 마음이나 기쁨으로 한 해를 거뜬하게 지냈다. 새 옷을 친구들에게 자랑하느라고 아침밥은 물론, 점심까지도 거르기 일쑤였다. 

까치 까치 설날이라 하는 것은 설날에 “까치 소리 들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라는 이유로 생긴 속설이다. 이와 비슷하게 “뭐, 좋은 기별이 있냐”고 새해에 묻는 말은 조선 전기 때부터 있던 관청으로 지금의 관보와 같은 ‘조보(朝報)’를 만들었던 기별청에서 관직에 오른 소식만을 학수고대하던 옛 선비들의 ‘기별(奇別)’과도 같다. 

또 좋은 날에 깨끗한 옷을 입는 것은 단정한 차림으로 친척과 친지, 문안객을 맞이하는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다.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와 같이 차림새로 상대방에게 기쁨을 갖게 하는 것과도 같다. <솔로몬>이야기에는 “옷은 다른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라고 했다. 

일찍부터 우리 조상들은 ‘의관정제(衣冠整齊)’를 사람됨의 주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다시 말해서 옷의 가치를 알고, 또 옷 입기를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긴 것이다. 영화 <해리 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나오는 저녁 식사 풍경과도 비슷한 영국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 복장과 사교에는 개개인의 신분을 넘어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소통을 위한 도구로 옷이 활용됐다. 이와 반대로 부정한 일이나 싫어하는 만남에서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옷을 입었다고 한다.

인류에게 의식주는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지금이야 풍족한 때라서 의식주에 관한 걱정을 하는 이가 드물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등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반쪽 북녘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지금같이 풍족하다고 자기 마음대로 쓰고 버리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일부 혹자는 한국 사람들과 같이 물건을 마구잡이로 쓰면 “우리가 사는 지구가 일곱 개쯤 더 필요하다”라고 꼬집었다. 그래서 설날을 계기로 아끼고 나누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제2의 ‘아나바다 운동’ 전개를 다시 권장해 본다. 

필자와 같이 구도자들은 승복 한 벌로 산다. 설날이든 좋은 날이든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내 안의 자존감으로 승복을 입는다. 제2의 피부라 일컫는 옷 대신에 광택이 없는 무너진 색, 즉 괴색(壞色)의 승복 차림이 전부다. 예로부터 승복보다 ‘분소의(糞掃衣)’로 불렀다. 사람들이 입다 버린 헌 옷으로 만든 가사를 일컫는데, 검소함을 닦는다라는 뜻으로 법의(法衣)라 해서 수행자의 옷을 말한다. 

올해에 입은 설빔이 우리 내면과 외면의 자존감을 키우기 위한 설 옷이 되기를, 그 차림으로 삶에 복락이 충만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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